내가 아닌, 타인의 삶을 살아본 적이 있나요?
회사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외부 명사들을 초청해 강연을 한다. 다른 회사들이 그렇듯, 우리 회사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시각과 창의성, 혁신(이라고 쓰고 실체가 잘 없다,라고 읽는 것들)이기 때문에 주로 인문학 연구자, 작가, 광고인 등을 모셔 그들의 생각을 듣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진다. 회사에 다닌 2년의 시간 동안, 가능하면 매 달 강연에 참석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시각을 엿보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강연은 주로 만석인데, 이유는 당연히 점심을 주기 때문이다. 인재육성팀에서는 늘 맛있게 잘 말린 김밥과 촉촉한 샌드위치, 그리고 바나나와 따뜻한 커피 등의 간식을 준비하고, 구성원들은 강연 시작 30분 전부터 줄을 선다. 점심도 때울 겸, 강연도 들을 겸, 겸사겸사 가는 거다. 직장인의 점심시간은 의미 없이 흘러가는 경우들이 많으니까. 하지만 이런 일상성을 깨고 대거 인원이 몰려 김밥을 추가 수급하러 인재육성팀 막내가 뛰어나가야 하는 사태가 발생했으니, 바로 김영하 작가가 왔을 때다. 알쓸신잡의 히어로, 섹시한 문학적 두뇌의 보유자. 주제는 간단했다.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
곧 〈알쓸신잡3〉가 나오니, 많이 봐 달라는 자기 홍보로 강연을 시작한 작가는 곧 유려한 말솜씨와 적절한 유머감각으로 좌중을 편안한 분위기로 이끌었다. 달변이었다. 주변의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늘어놓는 것 같았지만 핵심은 명료했고, '마담 보바리', '안나 카레니나', 또 '위대한 개츠비' 등의 다양한 예시를 들어 하고자 하는 말들을 풀어놓았다. 한 시간 반의 강연 시간 동안 그는 우리가 왜 소설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요지는 간단했다.
"소설을 읽는 것은 타인의 삶을 살아보는 경험이기 때문이죠."
공연에 있어서도 같은 생각을 한다. 소설을 읽는 이유와 공연을 보는 이유는 꽤 비슷하다고. 많은 소설들이 공연으로 만들어지는 이유 또한 두 콘텐츠가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공연을 보는 이유 중 하나는 공연이 우리 인생을 엔터테인먼트적인 측면에서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기 때문이고, 눈과 귀가 즐거운 경험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쇼와 퍼포먼스 중심의 뮤지컬들은 쉽게 볼 수 없는 생경한 무대를 접하게 함으로써 일상에서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고 비일상의 행복감에 젖어들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공연을 보는, 혹은 공연을 보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무대를 통해 타인의 삶을 살아볼 수 있는 경험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기에, 다양한 사람들과 감정을 마주하며 살아간다. 서로 다른 감정을 마주했을 때 그 감정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하기에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타인의 감정을 잘 이해하는 사람을 우리는 '공감능력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곤 한다. 공감능력은 8할은 (어떠한 형태이든) 경험에서 나온다. 한 번 비슷한 상황에 처해본 이는 유사한 상황에 있는 사람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없기에 책을 읽고, 드라마와 영화를 보고,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공연은 그런 관점에서 타인의 경험을 느끼기에 가장 좋은 전도체(電導體)다. 공연은 인물과 상황과 감정을 무대 위에서 극대화하여 보여주고 들려주기 때문이다. 소설과 같은 경우 묘사와 대화의 서술을 통해 상황과 감정을 보여주기에 상상과 해석의 여지가 존재하지만, 공연의 경우 배우가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을 연기와 노래를 통해 직접적으로 전달하므로 우리는 그 감정을 가장 날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기 내용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뮤지컬 〈인터뷰〉를 잠시 가지고 오자. 나는 이 뮤지컬을 '멘탈박살극'이라고 부른다. 에너지 넘치는 어두운 넘버, 두 남자의 팽팽한 대립 구도, 그 사이를 찢고 나오는 한 여자의 목소리. 언뜻 보면 굉장히 멋진 구성과 조합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내가 느끼기에 이 극은 온갖 불편함을 한 무대 안에 욱여넣은 폭발 직전의 다이너마이트 같다. 그것도 단 한 명의 인물, '싱클레어 고든'에게 그 모든 것을 집어넣었다. 그는 해리성 인격장애를 앓는 '다중인격자'이고, 살인과 방화, 친누나와의 부적절한 관계 속에 살아가는 인물, 한 마디로 괴물이다.
하지만 우리는 극을 보면서 '무엇이 그를 저렇게 만들었나?'에 집중하게 된다. 무대 위에 뒹굴며 머릿속의 다른 인격들에게 나가라고 소리치는 그를 보며, 그 안에 있는 공포심과 두려움과 불안을 보며, 또 결국은 모든 상황들이 정신과 의사 '유진 킴'의 시뮬레이션인 것을 알게 된 우리, 관객들이 느끼는 것은 거부감이나 공포가 아니라 연민이다. 그것은 우리가 극 속에서 '싱클레어 고든'에게 이입하여 그의 삶을 함께 살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아버지의 물리적, 성적 폭력이었으며 그의 인격을 무너뜨린 것은 사랑하는 누나의 배신이었다. 그 속에서 가정으로부터도, 사회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한 불쌍한 인간이 바로 그인 것이다.
극은 무대에 오른 배우의 눈빛, 대사, 노래를 통해 상황을 설득한다. 배우의 연기에 진정성이 필요하고, 무대와 연출과 조명이 무대를 받쳐줘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무대 위에서의 모든 움직임은 관객들에게 무대 위의 이야기를 설득해야 한다. 그러면 관객들은 원래의 자신을 벗어나 무대 위의 인물로 잠시 존재하게 되고,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보는 경험의 이어진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로 넘어와 보자. 한 아이의 춤을 향한 열망, 발레를 향한 순수한 욕망을 이 이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무대가 있을까. 〈빌리 엘리어트〉의 넘버 'Dream ballet'와 'Once we were kings'를 듣고 볼 때면 매번 눈가가 뜨거워진다. 마가렛 대처가 '철의 여인'으로 불리게 된 그 시절, 탄광 산업 국유화로 파업이 계속되는 희망을 잃은 마을에서 당시 남자들에게는 일반적이지도 않았던 발레를 갈망하는 한 소년이 있었다. 〈빌리 엘리어트〉는 영화가 원작이지만, 나는 뮤지컬이 이 극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눈 앞에서 열한 살밖에 안 되는 소년이 발을 구르고 춤을 추고 소리를 지르며 발레를 열망하는 모습보다 더 효과적으로 관객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빌리 엘리어트〉를 보다 보면, 나는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다. 나는 그때 어떤 열망이 있었던가. 저 정도로 절박하게 무언가를 원한 적이 있었나. 우리 부모님은 왜 나에게 발레를 시키지 않았을까(?) 등. 그리고는 현실의 나로 돌아온다. 나는 지금 무엇을 저 정도로 간절하게 원하고 있나. 이런 생각들은 모두 극 속에 잠시 몰입해 '빌리'로 살아본 경험 때문이다. 그렇게 좋은 극은 나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앞으로 어떻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이 한 마디라고 생각한다. 공연이 관객들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 그렇구나, 그럴 수도 있겠구나. 너무나도 극단적인 상황이고,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삶을 엿보고, 그 삶을 살아보는 경험은 너무나도 소중하다. 〈인터뷰〉를 본 나는 그 이후로 괴물이 된 사람을 볼 때면 그 사람의 상처에 대해서 생각한다. 〈빌리 엘리어트〉를 본 나는 사람이 가진 열정과 갈망에 대해 생각하고, 나는 무엇을 좇아야 하는지 고민한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어떤 순수한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사람을 응원하게 된다.
그렇게 공연을 볼 때마다, 타인의 삶이 내 안에 스며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