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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은 Sep 08. 2023

아유, 또 딸이면 어떻게 해

성별전쟁

아이들 간식을 준비하려 학교 앞 분식집에서 포장주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둘째 아이 유치원 다닐 때 등하원하며 안면이 있어 가볍게 목례만 하던 또래 엄마가 가게로 들어왔다.

그녀도 포장메뉴를 주문하고 나란히 기다리며 서있는데, 제법 표시 나게 나온 내 배를 보더니 말을 걸었다.


"어머, OO이 동생 생겨요?"

"아, 네.."

"성별은 나왔어요?"

"아니, 아직이요. 다다음주쯤 병원 가는데 알려주실까 모르겠네요."

"아유, 또 딸이면 어떻게 해~"

"아아.. 그러게요. 하하."


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와 서둘러 계산한 후, 쫓기듯이 집으로 돌아왔다.

어쩐지 난 내 마음이 들킨 것만 같았다.


사실 임신을 알게 된 이후부터 줄곧 셋째는 아들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10년 전,

누군가 내 손에 자그고 새빨간 토마토를 두 개 놓고 간 첫 태몽에서 난 내가 두 명의 딸을 갖게 될 것을 직감했다.

큰딸을 낳고 그 후 10년의 세월 동안 내가 겪은 아이들의 성별에 관한 에피소드들은 마치 인터넷 관련 기사들을 모아놓은 것 같을 것이다.

둘째가 딸임을 확인하고 친정엄마는 낳기 전까진 모르는 일, 돌려놓을(?) 수 있는 일이라며 끝까지 부정하셨다.

애 하나 더 낳으란 집 안 어른들 말씀도 이미 아들만 둘 낳은 언니에겐 늘 예외였다.

딸 둘을 데리고 복작복작 육아에 찌들었을 때, 푸념하듯 둘만 잘 키우겠다는 말을 시어머니 앞에서 한 적이 있었다.


"네가 절손을 하겠다는 거?"


큰 의미를 두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대뜸 되물으시는 것에 난 당황해서 아무 대꾸 할 수가 없었다.

”절손“이라는 단어도 생소했거니와, 평소 아들 손자를 낳아주었으면 하는 말씀이나 그런 뜻조차 내비치신 적이 없는 분이셨기 때문이다.     


난 이미 두 딸을 가졌으니 셋째는 아들이어도 좋았고, 내가 세 자매의 둘째 딸로 자라나 어른이 된 지금도 그것이 이리 좋은 것처럼 내 딸들에게 막내 여동생이 생겨도 좋을 것 았다.

하지만, 과거 나의 둘째가 딸인 것을 알게 된 친척분이 "딸만 셋 낳은 즈이 엄마 닮았다."라고 한 말이 자꾸 떠올라,

나는 이번에도 내가 딸을 낳아 내 엄마가 나 때문에 또 그런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셋째가 아들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인터넷에 떠도는 온갖 성별테스트에 매달렸다.

중국황실달력, 베이킹소다테스트, 적양배추테스트, 착상초음파사진, 바늘점...

든 것은 딸을 가리켰다.

따져보면 어차피 확률은 50대 50이다.

딸이라는 결과에 실망하는 나 자신에 놀라고 화가 났지만, 딸도 갖고 싶고 아들도 갖고 싶은 내 마음이 "아들"만 바라는 것처럼 보일까 봐 감추고 싶어 져 짜증이 났다.

요즘 같은 시대에 덮어놓고 자식 많이 낳는 것도 흉인지라, 계획하지 않은 셋째임에도 아들 낳으려고 임신한 사람처럼 보이는 것도 싫었다.

어느 날, 이런 내 마음을 셋째 딸로 태어난 친동생에게 털어놓았다.

동생은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언닌 그 애를 낳을 자격이 없어. 뱃속의 그 아이는 언니의 세 번째 아이가 아니야.

그냥 그 자체로 한 명의 사람이라고.

지금 같은 마음이라면 그냥 수술이든 뭐든 해."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난 이 아이가 자신을 누군가의 세 번째 아이로 생각하고 세상을 살아가길 바라지 않는다.

나의 셋째는 하나뿐인 자신이다.

 그 사실만으로 살아가길 진심으로 원한다.     


아이들의 성별은 그저 내가 세상을 좀 더 다양하게 볼 수 있게 해 줄 뿐이다.

그동안은 딸들, 여자들의 삶에 대해 고민하고, 공감했다.

그러한 것의 결과물로 <딸에게 포스트잇>이라는 책도 낼 수 있었다.

지금은 아들, 남자들의 삶도 보이고, 그 삶이 궁금하다.

남의 나라 얘기인 듯했던 군대 관련 뉴스도 이젠 자리를 뜨지 않고 보게 되고, 서운하기만 했던 시어머니의 무한 아들바라기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픈 마음이 생겨난다.

자식들이 부모를 통해 세상을 본다고 했던가.
부모도 아이들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본다.


뒤늦게 찾아온 나의 아들은 그렇게 나의 또 다른 눈이 되어주고 있고, 나는 이제 막 시작하는 아들 공부에 오늘도 숨이 찬 하루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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