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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은 Sep 08. 2023

제발 애국자라고 말하지 마요

셋째를 결심하다

2007년에 큰아이, 2009년에 작은 아이를 낳고

무려 6년이 지난 2015년 9월, 추석 연휴가 한창일 무렵 셋째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혹자는 말했던가.

셋째는 가족계획과는 관계가 없다고.

그건 그냥 피임의 실패라고.     


첫 아이를 가졌을 땐 임신을 확인한 순간부터 임산부카페에 가입을 해 빈번히 드나들며, 다른 임산부들과 임신기를 공유하고 줄어드는 주수를 확인했다.

아기수첩에 붙여놓은 초음파 사진을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여다보면서 하염없이 신기해하고, 배넷저고리와 아기장난감 D.I.Y 키트를 구입해 손수 만들 세상에 나 혼자 아이를 가진 냥 굴었나 보다.

평생 처음으로 다이어트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고 맛있는 것을 맘껏 먹을 수 있으니 좋다며 주변에 자랑을 하던 나는, 당연히 내가 엄마가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뭣”도 몰랐다.

     

둘째 아이부터는 내가 가진 경험들이 정보가 되었기에 각종 육아사이트에서 좀 멀어질 수 있었다.

아니, 그보다 터울이 채 24개월도 안 되는 큰 아이 육아로 인터넷은 할 엄두조차 내지를 못했다. 나에게 두 번째 임신은 그저 하던 육아의 연장이었고, 신경은 온통 큰 아이였다. 입덧조차 마음껏 할 수 없었던 두 번째 열 달은 태교마저 사치일 정도로 정신없이 지나갔다.     


두 아이를 낳고,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까지 여느 또래 엄마들처럼 질풍노도의 전투 육아기를 겪으며 때로는 지옥을, 때로는 천국을 노크하며 살았던 것 같다.

다람쥐, 토끼 같은 두 딸들과 밤낮으로 뒹굴며 같이 울고 또 같이 웃었다.

맞벌이를 하셨던 부모님의 부재로 외로웠던 나의 어린 시절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기에, 당시 안정된 직장이었던 공무원 생활도 육아휴직을 닥닥 긁어 쓴 후 과감히 정리했다.

물론 양가 어르신들의 육아지원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상황도 한몫을 했다.      


셋째 아이의 임신기간은 썩 유쾌하지 못했다.

호르몬의 노예가 되어 감정이 천장과 바닥 사이에서 널을 뛰어서였는지, 아니면 ‘이건 인간적으로 너무하다’ 싶을 정도의 입덧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사로 인해 3학년 전학을 해야 하는 첫째,

첫째가 전학하는 학교로  입학을 해야 하는 둘째가 걱정이 되었고, 둘째를 입학시키고 나면 이제 한숨 좀 돌릴 것 같았는데 다시 처음부터 신생아 육아를 시작해야 하다니.

같은 출발선에서 달리기를 시작한 동료들은 이제 막 결승선을 지나고 있는데, 누군가 내 트랙 앞엔 “출발선으로 되돌아가시오”란 푯말을 가져다 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적지 않은 내 나이가 제일 신경이 쓰였다.          

셋째 임신 15주가 지나갈 무렵까지도 난 여전히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나는 이 임신이 행복하지가 않아.”     


매일 저녁 퇴근한 자신을 붙들고 울며 짜증 내는 나에게 남편은 급기야 나의 모든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나는 "15주 임신중절"을 열심히 검색할 만큼 극단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호르몬의 장난이 끝나서 인지 아니면 생각을 바꾸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것 같은 나 자신의 방어본능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문득 이 열 달의 기간을 “나”와 “변화될 ”나의 일상“에 집중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아이를 가졌으니 낳기만 하면 되었던, 지난 두 번의 임신기간 동안에 놓쳐온 것들이 발견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기로 했다.

세 아이의 엄마가 된다는 것에 대해 제대로 감도 못 잡고 있었지만, 그건 누구도 미래를 가늠할 수 없는 것과 똑같다.


과거의 난 하루하루 그날의 할 일들만 하며 살아왔다.

당시엔 몰랐는데 지금 되돌아보니 그랬다.

저 너머에는 언제나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육아와 가사보다 더 가치 있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 조바심을 내었다.

하지만 이제와 다시 생각해 보면 그때의 그 일들이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들이었다.

그리고 아이를 외면하면서 까지 누릴 수 있는 부귀영화는 사실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난 세 번째 아이를 선택하면서 놓치게 될 것이라고 여겨지는 그 모든 기회비용들을 계산하는 것에 참으로 지쳐버렸다.    

 


셋째를 낳으면 그 아이 돌잔치에 손님들을 부르는 것 초자 민폐라는 시대에, 자식 한 명당 3억의 교육비가 들어간다는 무시무시한 시대에, 어쩌면 마지막 출산의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모질지 못한 미련으로 나는 애 셋의 엄마가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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