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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민 Mar 11. 2020

19살에 한예종을 합격했다면...

한예종 학부 출신들은 장점도 많지만, 한계도 뚜렷하다. 지난 몇 년간 한예종 예술사과정 (학부)을 30명 가까이 합격시킨 내가 보기엔 그렇다. 특히 19세나 20세의 어린 학생이 합격했다면 그것이 행운인지 독이 되는지는 개인에 따라 매우 다르다. 음악원의 몇몇 학과를 제외하면, 한예종 예술사과정에 합격했다고 해서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고 말할 근거 역시 전혀 없다. 오히려 실력보다는 운이 좋았거나, 소통에 능하며, 매력이 넘치고, 가능성이 높은 학생이라는 설명이 더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합격한 학생들은 주위의 시선이나 칭찬에 들뜨게 마련이다. 쟁쟁한 교수들과 직접 소통하면서 친해지기라도 하면 자신이 정말 대단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미 마음만은 박찬욱, 봉준호가 되어 있는 것이다. 많은 예술가가 상업적으로 성공하면 (유명한 영화감독같이) 대학의 관련 경력을 쌓고 싶어 한다. 만일 어느 감독이 500만 정도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를 두세 편 찍었다고 가정해보자. 가장 추가하고 싶은 경력은 어떤 것일까? 바로 대학 겸임교수다. 특히 한예종에서의 강사 경력은 여타 대학에서의 정교수만큼이나 매력적인 자리다.


오직 실력만이 통하는 곳이 현장이다


한예종의 경쟁력은 교수진만큼이나 막강한 강사진에서 나온다. 이런 극강의 강사진이 푼돈에 불과한 보수를 받고도 한예종에 몰려드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 엄청난 강사들과 수업 후 울랄라 빈대떡집에서 막걸리라도 한잔하면 어떤 기분이 들까? 자신도 그에 견줄만한 예술가가 되었다는 착각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장은 살벌하기 마련이다. 오직 실력만이 통하는 곳이 현장이다. 연극, 연기, 뮤지컬 분야가 특히 그렇다. 뮤지컬 배우 중에 대단한 학력을 가진 사람이 누가 있는가. 학력과 뮤지컬 배우로서의 성공 간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오직 실력이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한예종에 입학한 학생들의 몰락이 더욱 많고 빠른 것이다. 그들이 학교에서 경험한 허상은 실제의 현장에서 무참히 무너진다. 그러면 그들은 실력이 아닌 현장의 시스템을 탓하기 쉽다. 현장은 썩었으며, 예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쓰레기들이라고 깎아내린다. 예술 분야 전반을 비판하다가 자신이 선택한 그 길을 포기한다. 그리고선 예술계 언저리를 기웃거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편견일 뿐이니 지나친 확대해석은 하지 말자. 어느 정도 공감이 된다면 그 부분만 취사선택하자. 사실 한예종 학부도 좋지만, 한예종 전문사도 매우 좋다. (굳이 합격시켜 준다면야 그것을 마다할 필요는 없지만) 어린 나이에 한예종 입학의 기회가 닫혔다고 해서 크게 좌절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사회적 경험과 균형감각, 인문학적 토양을 쌓지 않은 채 주입받는 예술 교육은 축복이 아닌 독에 가깝다. 오히려 평범한 일반대학에 진학해 미팅도 해보고 학생운동도 해보고 스펙도 쌓아보라. 어학연수도 가보고 인턴도 해보고 동아리 활동도 하면서 폭넓은 사회경험을 쌓는 것이 좋다. 그렇게 나름의 인문학적 토대와 자아정체성을 확고히 다진 후 예술에 대한 확신과 실력, 포트폴리오와 경력을 충분히 갖춘 후에 한예종 전문사(석사 과정)에 도전해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무엇을 배워야 할지, 어떤 실기가 필요한지를 알고 하는 공부가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는 말이다.


왜 작가 중엔 영재가 없을까?


그런 좋은 예로 <추격자>의 나홍진 감독을 꼽을 수 있다. 나홍진 감독은 조각을 전공했다. 이미 입학 전부터 소문이 자자했고, 결국 한예종 전문사에 진학해 방점을 찍은 것이다. 일반대 학부 졸업 -> 한예종 전문사 -> 뚜렷한 작품세계와 예술가로서의 성공, 이것이야말로 내가 보기에 최고의 코스다. 음악 분야, 특히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같은 기악 쪽은 어린 나이부터 한예종을 가거나 영재 교육을 받는 쪽이 백번 낫다. 괜한 학벌 우선주의로 이른바 명문대에 입학하면 그저 그런 평범한 음악인으로 남을 가능성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분야는 그렇지 않다. 극작과 연출 분야는 더더욱 아니다. 나이 열아홉에 극작을 전공하고 스물셋에 졸업한 학생을 생각해보라. 예술가로서의 무게는 잡을 수 있을지 모르나 현장은 냉정하다. 인간에 대한 통찰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에 단순한 기교나 기술 따위론 범접할 수 없는 고민과 경험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음악이나 체육 분야엔 종종 나오는 영재가 작가 중엔 없다. 노벨 문학상을 받는 영재 따위는 존재할 수 없다. 


만일 한예종이 열아홉의 당신을 받아준다면 이 글 따위는 까맣게 잊어도 좋다.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열심히 다녀라. 진심으로 축하한다. 분명 예술계로의 길이 활짝 열린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한예종이 당신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일반 대학에 진학한 후 보다 깊이 있는 예술을 하리라 굳게 결심하라. 하지만 예술에 대한 열정을 절대 잃지 마라. 그 길이 진짜 당신의 길이라면 그 열정은 오히려 더욱 불타오를 것이다. 대학에서 예술에 도전하라. 공모전, 아마추어 동아리에서 최대한 많이 경험하라. 많이 실패하라. 그렇게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다음, 그동안의 작업을 모아 한예종 학부나 전문사에 도전해 보라.


무조건 경력과 실적을 쌓아라


특히 전문사를 추천한다. 명문대 출신의 학생이나 의대생, 카이스트 출신, 등단한 작가 등 정말 엄청난 스펙과 화려한 경력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다. 그들을 한곳에 모은 이유는 단 하나다. 예술에 대한 열정이다. 그들과 교류하고 소통하며 최고의 실기를 배우라. 그러고 나서도 당신은 여전히, 예술가로서 너무 젊은 나이일 것이다. 기껏해야 30대 초반 혹은 중반일 테니까. 그땐 예술을 움켜쥐고서도 실수할 가능성이 작을 것이다. 결국, 평생에 걸쳐 예술을 할 수 있는 내공을 쌓게 될 것이다.


물론 전문사는 기준이 높다. 바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준비된 예술가를 원하기 때문이다. 일반 대학에 가서도 예술에 대한 도전을 성실히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감독을 꿈꾼다면 굳이 대학이 아니라도 가능한 길은 너무나 많다. 무조건 경력과 실적을 쌓아라. 그래야 전문사에 진학할 수 있다. 확실한 한 가지는 한예종 전문사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이다.


예술이야말로 긴 호흡이 필요하다


어린 나이에 한예종에 진학하고, 승승장구하는 것은 분명 매력적인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때론 독이 되기도 한다. 최선을 다했으나 예술사도, 전문사도, 그 어떤 대학 입시도 실패했다 해도 상관없다. 성공한 감독 중 대학에서 정식으로 영화를 전공한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거장이라면 더욱 그렇다. 분명한 것은 예술이야말로 긴 호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가장 공정한 분야이기도 하다. 사회에서 수없이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과 인생에 대한 통찰로 이어진다면 결국은 보석 같은 경험들인 셈이다. 그깟 대학이 뭐가 중요한가? 예술을 하겠다는 꿈만 확실하다면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


인생엔 순리가 있다. 허락된 환경 안에서 최고의 것을 선택하면 된다. 그곳에서 최선의 것을 끄집어 낼 수만 있다면 반드시 정상에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자꾸만 환경을 바꾸려 애쓰지 말고 (저 학교에만 가면 성공할 것이란 착각을 버려라)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고의 것을 만들어내는 법을 배우라. 정상으로 가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자신만의 길을 개척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의 목적은 예술적 성취이지 좋은 대학 나오는 게 아니지 않은가? 목표와 목적은 다른 것이다. 한예종 진학이 단기적 목표일 수는 있어도 인생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목표가 좌절되었다 해서 인생의 목적마저 잃어버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 그 목적이 분명하다면 목표는 얼마든지 수정 가능한 것이다. 단기간의 목표는 수없이 실패해도 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다만 원래의 목적을 잃어버리는 것만큼은 한없이 두려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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