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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민 Dec 05. 2019

예술은 왜 그토록 매력적일까

연기를 하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도전 중 하나는, 배역에 대한 이해가 삶의 경험을 그만큼 확대해 준다는 사실이었다. 시나리오를 쓰는 일도 극작을 하는 일, 연출하는 일도 마찬가지 아닐까? 연기자가 다양한 층위의 삶을 넘나들며 경험한 그 삶의 경험이 어찌 보면 실제 경험보다 더 큰 경험의 확대를 불러올 수도 있다. 돈이 있으면 세계여행을 마음껏 다니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연기자는 돈이 없어도 시공간을 초월한 여행을 떠날 수 있다. 오늘은 햄릿을, 내일은 리어왕을, 모레는 뜨레블레프를 그리고 다음 주엔 연산군을 연기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왜 예술에 열광하는가


나는 예술을 하는 이유 중 하나로 삶의 무한한 확장을 꼽는다. 한예종에서 현대문학상을 받은 시인 선생님의 수업을 받을 때였다. 시인 선생님께 시인을 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 선생님은 평범함으로 달려갈 것이 뻔한 자신의 인생이 특별함으로 채워지는 경험의 확대가 소중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시인의 삶을 선택했다고, 그리고 그 선택에 만족한다고 했다. 예술은 돈이 될 수도 있지만 대부분 돈이 안 될 가능성이 더 크다. 돈이 아니라면 우리는 왜 예술을 하는 것일까? 예술이란 삶 자체를 윤택하게 만드는 어떤 요소를 더해주는 게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특별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 아닐까? 종교가 내면의 평화와 깊은 안식을 주듯, 예술은 삶을 바라보는 관점을 더욱 더 특별하고 풍요롭게 채워나가는 가치가 있다. 그래서 돈이 보장되지 않더라도 많은 이들의 마음을 훔칠 수 있다.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


예술, 삶의 무한한 확장을 위하여


예술가들의 삶 자체를 생각해 보면 쉽다. 그들이 지극히 고독하고,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해도 예술가이기에 그들의 작품은 무한한 확장성을 가진다. 윤동주의 삶이 비록 연약했다 해도, 억압과 채 꽃피우지 못한 가슴 아픔의 연속이었다 해도 그의 예술은 더없이 투명했다. 지금도 수많은 이들의 영혼 속에서 순결하게 빛나고 있다. 윤동주의 ‘자화상’이라는 시처럼 작가는 자신의 작품 속 거울을 통해 또 다른 자아를 바라보고 있는지 모른다. 인간은 모두 유한하다. 결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많은 부자와 권력자들이 부의 세습을 선택한다.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을 생각해 보면 쉽다. 그렇게 아버지의 욕망이 대를 이어 계승된다. 하지만 길어봐야 3대를 가지 못한다. 자식을 통한 계승은 반드시 왜곡되고 훼손되기 마련이다. 아무리 부모와 자식이라 해도 서로 다른 자아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핏줄보다도 더 강력한 유산 상속이 있다. 바로 예술가와 그의 분신인 작품을 통해 이루어지는 유산이다. 예술가는 죽어도 그의 작품은 영원히 남아 무한히 확대된다.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검증되지 않았지만) 셰익스피어가 남긴 작품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더욱 생생하게 관객들의 영혼 속에서 불타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안톤 체호프의 인간에 대한 치밀한 통찰이 서거 100주년을 넘긴 지금, 그의 육신과 함께 무덤 속에 묻혀 버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 체호프의 육신은 소멸했어도 영혼은 살아서 그의 작품을 통해 계승되고 있다. 그래서 모든 고전은 현세적이지 않고 내세적이다. 작가들은 마치 투탕카멘 왕의 영생을 향한 갈망처럼 작품을 통해 내세를 욕망한다. 육체는 소멸하나 영혼은 계승되는 내세적 삶 말이다.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삶의 무한한 확장이 예술의 또 다른 가치이다.


블로그 - 네이버                                  유진 오닐 作 <밤으로의 긴 여로>


예술이 매력 있는 한 가지 이유


그러므로 예술가는 내세적인 사고를 할 필요가 있다. 예술가에게는 불멸을 꿈 꿀 권리가 있다. 오늘날의 현실에 안주하지 말되, 그렇다고 체념하지도 말라. 고통의 뿌리 속에서 위대한 예술이 꽃피운 사례는 수많은 역사가 증명한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걸작들이 쏟아져 나온 20세기 현대예술을 보라.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대변되는 1,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며 인간성이 가장 깊은 밑바닥으로 고꾸라졌던 시절 아닌가. 그 참혹한 인간성의 절망 속에서 예술은 역설적으로 그 꽃을 피운다. 일본 강점기의 절망 속에서 윤동주의 문학이 가진 투명성은 더욱 빛날 수 있었다. 6.25 전쟁의 참혹한 현실이 차범석의 ‘산불’과 같은 작품을 낳았고, 서슬 퍼런 독재정권으로 인한 무력감이 기형도의 문학을 낳았다.


예술가여, 불멸을 꿈꾸라. 나의 육체는 한 줌 흙으로 사라지지만 나의 작품과 예술은 시대를 넘어 확장된다. 그러므로 창작하는 일은 모든 걸 다 쏟아부을 만큼 가치 있는 일이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유진 오닐은 그 자신을 소재로 마지막 작품인 <밤으로의 긴 여로>를 썼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생명을 깎아가는 자기인식의 고통 속에서 피범벅을 이루며 썼다고 한다. 인간 유진 오닐의 육체는 오늘날 썩어 없어졌지만, <밤으로의 긴 여로> 속에 영생하는 그의 자화상은 긴 그림자로 나의 영혼을 오늘도 감싸 안는다. 예술은 묘한 거다. 예술은 영(靈)적인 거다. 그래서 예술은 매력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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