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은 항상 내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한라산탐방예약시스템을 통한 예약부터 아이젠, 등산스틱, 스패츠 등의 설산 등반 준비물도 모두 챙겼다. 이제 할 일은 예약한 날 새벽 7시에 관음사 등반로로 가는 것. 어린아이가 다음날의 수학여행을 기다리듯 설렘을 가지고 결전의 그날을 기다렸다. 하지만 인간의 계획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했던가. 예약이 잘 되었나 확인하려고 킨 한라산 예약 홈페이지에서 나의 눈을 의심하게 만든 4글자가 떠있었다.
관음사 탐방로 전면 통제
현실을 부정하며 여러 글들을 찾아보니 눈이 조금이라도 흩날리거나 날씨가 좋지 않을 때는 통제되기 십상이라는 말들을 쉬이 찾아볼 수 있었다. "백록담은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더라.", "한라산은 제주도민도 잘 못 올라간다."라는 말들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예약을 했으니 의지만 있으면 오를 수 있다는 한낱 서울사람의 상상에 콧방귀 치듯 전면 통제라는 4글자는 정성껏 준비한 한라산 비기너들의 마음을 짓밟았다. 아쉬운 마음에 전면 통제가 풀리기를 기도했지만, 기적처럼 우리가 가는 날 아침에 풀리기란 기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따금씩 풀리기도 한다는 말에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자기 전, 등살에 필요한 준비물들을 하나둘씩 꺼내두었다. 비가 거두기를 바라며 걸어두는 테루테루보즈처럼 전면통제가 풀리기를 바라는 나만의 기도였던 셈이다. 그리고 오지 않던 잠을 청한 후 새벽 5시 15분, 거짓말같이 카톡이 왔다.
탐방 당일 통제가 풀리는 기적 같은 알람, 이 카톡을 보고 얼마 자지 않은 피곤을 물리칠 도파민이 몰려왔다. 내심 아침에 푹 자겠다는 알량한 생각은 사라지고, 오늘 꼭 정상을 보고야 말리라는 목표의식만이 뚜렷해졌다. 쓰임이 없어질뻔한 등산 장비들도 더욱 윤기가 도는 듯했다. 준비를 마치고 차를 이끌어 향한 곳은 김밥집. 한라산 등반객들을 위해 새벽 6시부터 운영하시는 분식집이 여럿 있었다. 8시간의 산행을 책임질 탄수화물과 일용할 양식을 준비해야 하였다.
김밥 1줄을 챙겨 먹고, 2줄을 챙겼다. 한라산 등반에 탄수화물이 필요하다며 어묵도 챙겨 먹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이 어묵 하나가 등반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김밥 두 줄, 컵라면 2개, 뜨거운 물을 담은 텀블러, 올라가며 먹을 간식들, 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처럼 등산을 위해 야무지게도 챙겼다. 오늘도 전면 통제로 결국 올라가지 못했다면 배낭도 아쉬웠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관음사 탐방로 입구로 향했다.
7시에 등반을 시작하니 옅게 깔린 새벽빛이 앞을 비춰주었다. 새벽 6시 정도에 등반을 결심한다면 헤드 랜턴은 무조건 챙겨가는 것이 안전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도 사실 챙겨 왔지만, 생각보다 날이 밝아 쓰지 않았다. 올라가며 보니 왜 사람들이 설산을 꼭 와봐야 한다고 하는지 몸소 느낄 수 있는 뷰였다. 눈이 옅게 깔린 나뭇가지들 사이로 부는 진눈깨비, 그리고 올라가면서 보이는 눈으로 옅게 칠해진 나무들로 구성된 설산의 뷰가 생경한 느낌을 받으며 오르면 오를수록 한라산이 가진 생기를 함께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괜히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고 불렸겠는가. 계속된 산행에 나와 내 아내는 점점 지쳐갔다. 산행 2시간을 넘어가자. 점점 우리의 표정은 없어지고, 얇게 겹쳐 입었던 옷가지들을 한 겹씩 벗기 시작했다. 사나이의 옷을 벗기는 것은 설산의 바람이 아닌 산행을 하며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였다. 중간중간 힘들 때마다 아르기닌과 챙겨 온 초콜릿을 먹으며 올라갔다. 하프 마라톤도 1년에 2번 정도 곧잘 뛰는 나였지만, 4시간의 산행을 가뿐히 올라가기란 쉽지 않았다. 3시간 정도 올라갔을 때 즈음 아내의 동공이 풀리면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커졌었지만, 그때 내려가도 3시간은 내려가야 했기에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올라가면서 설산의 풍경을 다양히 찍겠다는 마음이 있었지만, 찍을 체력이 한 계단이라도 더 올라야겠다는 일종의 생존본능에 의해 사진을 많이 찍지는 않았다.
해발 1,500m 정도, 약 3시간을 더 올라오자 슬슬 아래에 구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아닌 두 발을 땅에 딛고 있으면서 구름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이 있었던가? 눈 쌓인 한라산과 그 주위를 감싼 구름들은 3시간을 오르기에 충분한 풍경이었다. 나는 관음사 코스로 올라갔기에 성판악 코스로 등반한 후 관음사 코스로 하산하는 사람들이 보였었다. 그분들이 "이제 거의 다 왔어요."라고 하는 말을 들으며 올라왔는데, 그 말은 거짓부렁이었음을 1시간을 오르고야 깨달았다. 하지만 그러면 어떠한가. 온 김에 백록담을 보고 가야지!
그로부터 30분 후 드디어 사람이 웅성대는 지점이 나왔다. 한라산 정상이었다. 고된 산행을 마치고 인증샷을 찍으려고 줄을 서는 사람들로 메인 스팟은 북적였다. 빨리 사진 찍고 컵라면을 먹을 생각에 나와 아내는 줄 옆에서 조용히 백록담의 풍경을 눈과 카메라로 담았다. 시력이 좋지 않은 나도 백록담의 강렬한 모습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사진으로는 담기지 않는 웅장함과 자연이 보여주는 경외로운 자연스러움을 볼 때 4시간 산행의 고됨을 꺾을 수 있을 만큼의 흐뭇하면서도 보람찬 풍경이 눈에 담겼다. 아내와 함께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꼭 와보라고 권할 것임을 다짐함과 동시에 같이 가자고 하면 그건 좀 고민해 보겠다는 이야기도 곁들였다. 백록담을 보고 나서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한라산 정상에서 컵라면 먹기다. 컵라면은 진리의 육개장 작은 컵. 아내의 버킷리스트는 한라산 설산을 가보는 것이었다면, 나는 한라산 정상에서 컵라면을 먹는 것이었다. 비닐을 뜯는 그 순간의 설렘만으로 한라산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적당한 자리를 잡고 텀블러에 담은 따듯한 물을 컵라면에 따르고, 풍성하게 올라오는 열기에 올라오는 육개장의 내음을 맡으며 컵라면을 음미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흑백요리사에서 나온 무수한 요리들을 맛보더라도 이 육개장 작은 컵이 가져다주는 감동이 더욱 클 것이라 생각하며 한라산 정상에서의 점심을 마무리했다. 국물을 마시자마자 그 국물의 따듯함이 위장으로 내려가면서 따뜻함을 주는 것이 느껴졌다. 힘들게 올라왔던 그 고됨을 풀어주는 맛이었다. 그렇게 한라산 등반을 마치고 내려가는 길도 쉽지만은 않았지만, 올라올 때보다 발걸음은 감성적으로 가벼웠고, 이성적으로 짜릿했다.
한 살이라도 더 늙기 전에 가보자고 한 한라산 등반이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누군가는 버킷리스트로, 누군가 는 호기심으로, 누군가는 추억으로 가볼 수 있는 곳이지만 실제로 예약하고 다녀오니 생각보다 다녀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한번 더 깨달았다.(심지어 필자는 2년 전에 가려다가 제주도 비행기 결항으로 가지 못했던 전적이 있다.) 맑은 날 온다면 다른 매력이 있겠지라는 생각을 하지만, 다시 오를 기회가 있다면 갈까?라는 의문도 남는 듯 하다. 하지만 10년간은 충분히 느낀 한라산 설산의 매력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한라산 등반을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인생에서 한번쯤은 강력히 권해보고 싶다. 한라산 정상에서 컵라면은 꼭 먹어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