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준비해 온 대화

EP 07 시칠리아의 트라파니 해변에서

by 래리
"우리 시칠리아에 가보자"

신혼여행 계획을 짤 때 아내가 이탈리아의 주요 관광지를 보며 나에게 어디를 제일가보고 싶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언젠가 가보고 싶다는 로망이 있었던 것처럼 시칠리아라는 도시를 말했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에 남부에 위치한 섬으로 지중해 최대의 섬이라고 일컫어지는 섬이다. 원래부터 가보고 싶었던 도시냐고 한다면 대답은 아니다. 나에게 시칠리아는 김영하 소설의 '오래 준비해 온 대답'으로 가장 먼저 접했었다. 에세이나 소설보단 자기 계발서나 기술서를 좋아하는 내게는 감명 깊게 다가온 책은 아니었으나, 이탈리아 여행지라는 단어를 들으니 시칠리아란 여행지가 뇌리에 박혔달까.


그렇게 충동적으로 떠오른 시칠리아는 나에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탈리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에 있지만 이탈리아 남부에 떨어진 섬으로 제주도의 약 14배 정도 크기가 되는 크기를 가지고 있다. 서울과 제주도의 느낌이 천차만별이듯, 시칠리아에 도착했을 때 도시는 로마를 가서 느낀 자유로움과는 다른 무언가의 풍미를 뿜어내고 있었다.


나와 아내는 시칠리아 팔레르모 공항에 도착하여 근처에 있는 Carini 근처 숙소에서 잠깐 눈을 붙인 뒤 트라파니(Trapani)의 에어비앤비 숙소로 이동했다. 트라파니의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우리 부부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렇게까지 좋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좋은데..?

40평은 되어 보이는 방과 4개의 침대, 그리고 2개의 화장실, 4인 가족이 써도 충분히 남을만한 별장 같은 숙소가 있었다. 사람의 기분과 태도는 환경이 영향을 미친다고 했던가. 별장 같은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오랜 여행으로 쌓인 피로는 여행의 묘미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숙소에는 화구와 다양한 조리도구가 구비되어 있었기에 우리는 단순히 여행객이 아니라 그곳에 살아보는 기분으로 시칠리아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여기서 이탈리아 음식 만들어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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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이 되면 악기소리가 들리며 사람들이 곳곳에서 모이는 로마와 달리, 시칠리아의 밤은 어둡고 조용했다. 하지만 시칠리아의 식료품점은 밤에 가장 환했고, 마트가 닫기 전에 재료를 사는 사람들로 인해 가장 활기로웠다. 배부른 생각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이탈리아 식료품점에는 한국의 라면이라던가 매운 소스들을 팔지 않아서 아쉬웠다. 아시아 나라로 여행을 가면 종종 한국의 식재료나 라면들이 보이곤 했는데, 이탈리아에서는 한국은커녕 아시아의 식재료, 공산품 등을 쉬이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특징이었다. 한국의 라면이 생각났던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각자 좋아하는 식재료들을 담았다. 나는 살라미와 모차렐라 치즈와 루콜라, 그리고 페로니 맥주, 아내는 파스타 면과 카치오에 페페를 만들 페코리노 로마노 치즈, 그리고 큰 닭다리 6개를 집어 들었다. 자취 경력이 10년 이상이었던 아내는 세심한 조리가 필요한 요리를 만들고자 했지만, 그에 비해 짧은 자취 경력인 나는 여러 가지 조리된 요리를 조합하는 전략으로 우리의 식탁을 꾸밀 궁리를 했다.


마트에서 사 온 재료를 각자 소분하고, 요리에 필요한 재료들을 씻고 다듬으며 묘한 안정감이 들었다. 집에서 비행기로 16시간이나 떨어진 여행지에서 이탈리아의 식재료로 저녁을 만들어 먹는 한국인이라니! 혼자였다면 외로워서 눈물 한 방울 흘렸겠지만, 모국어로 이게 맛있다고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나의 아내라는 것이 그 순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다.


아내가 준비한 요리는 시칠리아의 가지볶음인 카포나타 위에 닭다리살을 올린 요리(이후에는 카포나타라고 칭하자.), 후추와 치즈로 맛을 낸 카치오 에 페페이다. 나름 멋들어진 결과물을 낸 접시 사이로 올리브와 모짜렐라 치즈 위에 루꼴라로 나름의 색깔조합을 한 샐러드를 살라미와 같이 올렸다. 아내는 파스타에 면수를 조금 더 넣어도 됐겠다며,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표현을 내비쳤지만, 나는 이탈리아에서 먹은 음식 중 가장 따뜻한 음식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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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의 에어비앤비에서 만든 카치오 에 페페와 카포나타 위 닭다리, 루꼴라 샐러드

'우리 집에 가서도 이탈리아 요리를 종종 해 먹자!'는 아내의 말에 나는 '와인도 곁들여서!'라는 말을 덧붙였다. 20대 시절, 언젠가 결혼을 한다면 서로 좋아하는 음식을 해주는 모습을 상상한 적이 있다. 내가 그녀에게 해주고 싶은 음식을 만들고 그녀가 나에게 해주고 싶은 한 끼를 해주는 모습 말이다. 문득 내가 이탈리아의 섬에서 아내와 나누는 대화와 음식들이 내가 준비해 온 대화가 아닐까 상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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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파니의 에어비앤비 접시에서 느낀 안정감의 맛처럼 여행이라는 것은 여행지의 음식이나 경치와는 달리 함께하는 사람과의 연대의식에서도 그 진가를 누릴 수 있나 보다. 그것이 신혼여행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따뜻한 접시의 추억을 안고 돌아본 트라파니의 건물은 파스텔 톤으로 더욱 밝게 빛났다. 채도가 낯은 트라파니의 건물들 사이로 핑크색 구름이 푸른 하늘을 감추고 있었다. 우리가 바라보는 시선은 웨스 앤더슨의 영화가 되었고, 우리가 사진으로 담은 순간들은 요시고의 사진처럼 평화로웠다. 그날 밤도 나는 30대 초반의 말미에서 시칠리아 트라파니 땅을 밟으며 그녀와 오래 준비해 온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2025.05.07. ~ 05.19. ROME – NAPOLI – AMALFI – SICILY
부부로서의 첫 번째 여정이자, 첫 번째 공동 창작물인 《그와 - 그녀의 허니문 콘파냐》는 저와 신부가 함께 이탈리아 남부를 달리고, 걷고, 맛보는 이야기에 대해 담을 예정입니다.
이탈리아에서의 자유를 만끽하며 각자의 언어로 함께 있는 시간을 기록해 보겠습니다.
신부의 글 ⇢ https://brunch.co.kr/brunchbook/honeyconpanna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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