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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 은 Mar 08. 2019

두 편의 시

       시의 모더니즘


현대 미국시는 모더니즘에서 출발한다. 20세기의 시는 모더니즘의 시다. 시인에 따라 낭만주의자, 사실주의자 등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20세기에 시를 쓰는 어떤 시인도 모더니즘을 벗어날 수 없다. 엘리엇의 몰개성 이론과 감수성 분열 이론, 파운드의 이미지즘으로 대표되는 영미 모더니즘 시는 주체의 과도한 서정성을 배제하고 언어에 대한 끊임없는 자의식을 보인다. 이는 현대에 나타난 주체와 세계 사이의 괴리에 대한 시적 대응이다.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포한 이래 현대인은 천상의 약속도 절대자를 향한 믿음도 잃은 채 삶이라는 벌판에 홀로 남겨졌다. 별이 속삭이고 나무가 손짓하고 꽃이 웃어주는 영적 세계는 그 신비의 베일을 벗었다. 낙원에서 추방된 아담의 후예는 ‘신의 언어’를 상실한 채 언어가 의미를 담지 못하고 끊임없이 부유하는 기호의 시뮬라크라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이런 괴리감은 이미 19세기 혹은 그전부터 시작되었지만, 20세기에 와서 재현 불가능성, 즉 내가 말한 것이 내 의도를 결코 정확히 담지 못한다는 인식이 더 첨예해졌다. 이런 인식은 시인들이 언어에 더 집중하게 만들었다. 재현 불가능성의 상황은 언어의 재현 방식에 대한 실험적 접근을 고무시켰고 언어의 속성에 관한 탐색을 일으켰다. 언어가 의미를 투명하게 담아내지 못할 때 언어의 매체성은 더욱 부각되기 마련이고, 시인은 점점 멀어져 가는 대상을 언어로 잡아보려는 불가능한 노력을 하게 된다. 


모더니즘의 시는 이처럼 대상과 시인 혹은 시적 화자 사이의 거리를 언어가 매개한다는 불가피성을 예리하게 의식하고 있다. 모더니즘 시는 서정적인 순간에도 화자와 대상 간의 거리를 드러내고 언어적 매개를 모색한다. 월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의 다음 시를 보자.   


겨울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서리와 눈 덮인 소나무

나뭇가지를 바라보려면

한동안 추워야 한다


얼음이 내려앉은 노간주나무와

저 멀리 찬란히 빛나는 일월의 햇살 속에

황량하게 서 있는 가문비나무를 바라보려면

몇 남은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의 소리에서

비참함을 생각하지 않으려면


그 소리는 

텅 비고 헐벗은 대지를

바람이 가득 채울 때 들려온다

눈밭에 서서 귀 기울이는 이에게

그는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채(無), 바라본다

그곳에 없는 무(無)와 존재라는 무(無)를. 

   --  <눈사람>(1921) 


 

월러스 스티븐스는 20세기 미국 시의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눈사람>이 묘사하는 장면은 간단하다. 1월의 어느 날 눈 덮인 교외의 한 정경이다. 여느 눈 내린 날의 풍경처럼 그곳엔 눈사람이 서있다. 숲이 있고 바람이 분다. 나뭇가지엔 눈이 쌓여있고 1월이니 날은 춥다. 눈이 내리는 고장이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모습이다. 하지만 첫 행부터 뭔가 범상치 않다. 시인은 “겨울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라고 말한다. 독자는 ‘겨울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 이어지는 두 행은 그 마음은 눈 덮인 소나무 가지를 바라보기 위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겨울나무를 바라보기 위해 ‘마음’이 필요하다니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2연의 첫 행에서 실마리가 보이는 듯하다. 시인은 눈밭에 서 있는 나무를 바라보기 위해서 “한동안 추워봐야 한다”라고 한다. 


1연과 2연까지 평범한 겨울 풍경 속에서 시는 심상치 않은 주제를 끌어내고 있다. 겨울에 나무들이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지를 본 적이 있는 독자라면 추위 속에 헐벗은 채 눈을 맞고 서있는 나무들이 불러일으키는 연민을 느껴 본 적이 있을 터이다. 보통의 서정시와 달리 스티븐스는 이 평범한 장면과 연민의 경험을 시선의 문제, 나아가 사물에 관한 인식의 문제와 연결 짓는다. 어떤 사물이나 장면을 오래도록 관찰한 이라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짐짓 일상적인 사물과 장면에는 자연적 물상의 원리와 진리, 삶의 진실이 담겨있기 마련이다. 다만 그런 진리와 진실은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오랜 시간의 관찰이 요구되며, 나아가 사고의 훈련이 필요하다. 시인이 말하듯, 겨울의 풍경이 전하는 진실을 보려면 ‘겨울의 마음’이 되어야 하고, 그런 마음을 위해선 훈련이 필요하다. 


여기까지는 이 시를 이해하는 것이 그다지 문제 되지 않는다. 인내심을 갖고 찬찬히 읽은 독자라면 두 연이 전하는 뜻은 비교적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일상의 평범한 사물이라도 그 사물을 이해하기 위해선 사물의 편에선 태도와 시선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3 연부터 내용은 좀 더 복잡해진다. 단순히 겨울나무를 바라보는 문제가 아니라, 바람소리를 들어야 하고, 나아가 바람소리에서 비참함을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이어지는 시행들은 “눈밭에 서서 귀 기울이는 이”가 바라보는 마지막 행의 “무”로 향해 마치 겨울바람이 불어대듯 돌진해간다. ‘겨울의 마음’은 따라서 단지 추운 겨울 얼어붙은 나무를 바라보는 연민의 시선에서 멈추지 않고 겨울바람 속에서 연민이 전제하는 헐벗은 비참함을 넘어서 “무”의 역설적 진리를 응시할 수 있는 시선이요 태도이다. 바람소리에서 비참함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연민이 그저 딱하다는 감정에 머물러선 안된다는 의미이다. 


겨울 벌판에 서있는 나무와 바람소리가 단지 추위에 떤다는 사실로 ‘비참’할 것이라고 곧장 결론을 내리는 것은 진정한 연민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연민이니 비참함에 대한 동정 따위에 담긴 어떤 인간적 맥락을 넘어서 진정 나무가 무엇이며 바람이 내는 소리가 무엇인지를 보고 들을 수 있는 눈과 귀가 필요한 것이고, 그것이 ‘겨울의 마음’이다. 이 마음에서야 비로소 이 시가 말하려고 하는, 하지만 “무”라고 밖에 쓸 수 없는 “무”, 겨울 벌판에 서서 귀 기울이는 이도 ‘무’가 되어 듣는 “그곳에 없는 무(無)와 존재라는 무(無)”를 이해하게 된다. 이 시는 짐짓 평범한 낭만주의적 명상의 시선으로 시작했지만 시제인 “눈사람”에 대한 묘사를 전혀 하지 않는다. 낭만주의적 자연시는 대개 자연의 물상이나 현상을 깊게 관찰 묘사하며 명상의 내용을 담는다. 


이 시는 그런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애초 자연의 묘사나 대상의 세부적 기록에는 관심이 없다. 제목의 “눈사람”이 눈밭에 서 있는 이일 것이라는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 시적 화자와 “눈사람” 사이에는 긴장과 거리가 유지되어있다. 겉으로 보기엔 겨울나무를 바라보고 바람소리를 듣는 시인이 말하는 것 같지만 그 모든 것을 듣고 보는 것은 “눈사람”이기도 하다. 첫 두 연에서의 낭만주의적 묘사 언어는 갈수록 애매하고 추상적이 되어 언어와 사물 간의 지칭 관계가 어긋나거나 모호해진다. 모더니즘 시에서는 대상과 시적 화자 혹은 주체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거리를 언어로 담으려 하는 과정에서 서정성이 나타난다. 가령 스티븐스의 시의 첫 두 연에 담긴 겨울 풍경의 묘사는 서정적 토운을 자아내지만 그 묘사들 자체가 어떤 특정한 장면을 지칭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아무리 읽어도 겨울나무의 모습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없다. 그렇다고 이 말이 모더니즘 시는 서정적이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모더니즘 시는 서정을 배제하지 않는다. 다만 전통적 서정시가 전제로 하는 시적 화자와 대상과의 합일 가능성과 서정적 화자 자신의 자기 동일성을 모더니즘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스티븐스의 시에서 시적 화자는 눈사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 시적 화자는 ‘겨울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독자에게 ‘명령’을 하고, ‘눈사람’을 3 인칭화하는 사람이다. 시적 화자의 모호성을 넘어서 화자가 아예 부재하고 오직 이미지와 비유만 지칭하는 언어적 구성물로서의 시는 E. E. 커밍즈 (E. E. Cummings)가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외로움>이라는 다음과 같은 시를 보자.   



l(a

le

af

fa

ll

s)

one

liness


 외

(잎

다)

움  


      --  <외로움> (1953)  



 외로움이라는 단어와 잎이 떨어진다는 문장이 기존의 시행과 연을 해체하고 낙엽이 떨어지는 모습처럼 ‘떨어져’ 내리고 있다. 여기서 시적 화자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잎이 떨어지는 모습이 외로움을 표현하고 있는 상황만이 있다. 이런 형태만으로도 이 시에서 서정과 감정은 충분히 표현된다. 가을에 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모든 인간이 느끼는 보편적인 감성이 담겨있다. 어떤 개인 화자가 외로움을 토로하는 것과 달리 사적인 경험을 넘어서 많은 독자들의 감정에 호소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렇게 시어를 분절시켜 묘사를 시각적으로 구성함으로써 시가 언어의 상(像)이라는 사실이 부각된다. 


이 두 개의 모더니즘 시를 읽고 우리는 모더니즘 시가 현대적 소외와 재현의 실패라는 경험에 대한 대응으로서 한편으로는 세상을 시각과 인식을 바꾸어 다시 혹은 제대로 보기 위한 언어를 모색하고, 또 한편으로는 사물과 현상의 이미지를 포착하기 위해 언어를 자르고 나누고 재조합해서 언어의 물질성을 더욱 부각하려는 시도를 확인했다. 이 두 시인의 시도는 20세기 후반의 미국 시단이 보여준 왕성한 언어적 실험으로 발전해갔다. 2차 대전 이후 미국 시는 다양한 유파와 경향들이 넘쳐났다. 뉴욕파, 비트 시인, 블랙마운틴파, 샌프란시스코 파, 언어 싶아 등 활동지역이나 시의 경향 혹은 특징에 따라 유파로 나뉘어 이름 불리지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앞서 살펴본 모더니즘의 세계관과 언어적 실험을 계승하고 있다. 다만 모더니즘 시가 스티븐스와 커밍스의 시에서 볼 수 있듯이 온전한 의미와 이미지의 창조가 가능하다고 믿거나 가능해야 한다는 당위를 갖고 있었다면 20세기 후반의 시는 어떤 믿음과 당위를 벗어나 언어의 기성 문법과 관행에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고 전위적인 실험을 마다하지 않았다.


 언어 시운동의 창시자인 찰스 번스틴이 정의하듯, 현재 미국 시는 새로운 실재를 상상하면서 현실의 보이지 않는 층위들을 보고 듣게 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 글을 시작한 스티븐스의 <눈사람>은 이미 20세기 초엽 이런 시적 노력을 시도한 셈이고 이후 미국 시인들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시적 실험을 시도했고 지금도 시도하고 있다.  




 *이 글은 시문예지 <외지>에 실린 현대미 국시론의 일부분을 발췌한 것이며, 수록된 두 편의 시 번역은 필자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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