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 은 Mar 13. 2019

부딪치며 쓰는 글

-수필론 1

++수필론을 시작하며++

수필은 이제 누구나 쓸 수 있고 쓰고 있는 문학의 한 장르가 되었다. 수필, 에세이, 산문이라는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이 문학적 글의 형태는 교과서에서 분석하고 암기해야 할 소위 명필가의 전유물이 더 이상 아니다.


그보다는 개인의 체험과 사색을 자유롭게 담아내는 사적인 텍스트로 진화하고 있다. 수많은 수필협회와 작가들이 양산되는 시대에, 나아가 인터넷과 모바일로 글쓰기가 더욱 자유로이 텍스트와 기술의 영역을 가로지르는 이 시대에, 수필이 어디서 비롯했으며 또 어떻게 써졌는지,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지 궁금해진다.


좋은 글을 선별해서 읽고 또 수필 이론을 검토해보는 작업은 자유로운 형식의 글 속에서도 명징한 생각과 운운한 풍취를 담은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

  김광섭의 「수필문학 소고」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무심히 생활 주위의 대상에, 혹은 회고와 추억에 부딪쳐 스스로 붓을 잡을 때 수필은 제작되는 것이다.

(인용자 강조).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이라는 구절로 유명한 이 글에서 김광섭은 수필문학은 “탁마 된 세련과 각고의 노력”을 들여야 하는 것으로 단순한 기록에 머물러선 안된다고 한다. 김광섭에 따르면 “붓 가는 대로” 쓴다는 것은 아무 생각 없이 쓰는 것이 아니라, 시나 소설, 희곡 등 다른 장르와 달리 논리적 의도나 의식적 동기를 배제한다는 뜻이다. 수필은 또 “붓 가는 대로” 쓰기 때문에 “개성적이며 심경(心境)적이고 경험적”이라고 한다. 이러한 수필은 ‘무형식의 형식’이 특징이다.

 

  “붓 가는 대로”, 즉 무형식의 형식으로 쓰는 수필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정답을 찾기란 어렵겠지만, 김광섭의 글은 한 가지 길을 제시해주고 있다. 앞에 인용한 대목의 강조된 부분을 보자. 김광섭은 수필이 개성적이기 위해선 무엇보다 이 “부딪침”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대상과 추억에 부딪치는 것이 수필의 동력이다. 수필의 화자는 객관적 대상뿐 아니라 심경, 즉 추억과 기억의 이미지에 부딪친다.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 사물과 자연의 풍경, 유년의 추억과 마음 저 밑바닥에 꽁꽁 묻어둔 상처들을 어느 날 문득 조우할 때 수필의 계기가 마련된다. 어떤 요구나 계획된 의도가 아닌, 부딪침에서 “스스로” 나온, “아무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평정한 마음으로 마치 먼 곳의 그리운 동무에게 심정을 말하듯이”, 즉 “붓 가는 대”로 글이 시작된다.


   이 부딪침은 하나의 ‘사건’이다. 사건은 역사적 시공간에서 새로운 것이 출현하는 방식이다. 사건은 모든 의미화 혹은 개념화 과정에 선행된 구체적 현상이자 ‘해프닝’이다. 우리의 삶은 이런 사건들로 시작해서 끝난다. 탄생 그 자체가 이미 사건이며, 성장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한 인생의 사건들이다. 생의 종착역, 죽음도 하나의 사건이어서 우리는 한 존재의 사라짐을 애도하는 예식을 치른다.


  문학은 기본적으로 사건을 의미화 혹은 재현하는 과정이다. 시나 소설, 희곡이 사건을 허구적으로 재구성한다면, 수필은 사건, 즉 부딪침의 해프닝에서 촉발되는 자아의 진솔한 반응을 담는다. 자아가 경험하는 온갖 부딪침을 있는 그대로 언어로 옮기는 문학이 수필이다. 그래서 김광섭은 수필은 어디에서 어느 때나 인간사회에는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장르라고 한다.


  수필다운 수필에는 부딪침의 사건이 있어야 한다. 그 대상은 ‘타자’이다.


 현대철학에서 ‘타자’는 나를 포함한 모든 대상을 의미한다. 남이라는 뜻의 ‘타인’과 달리 ‘타자’는 대상, 신과 자연 등 나 아닌 모든 것뿐 아니라, 내 안의 타자, 즉 무의식까지도 포함한 개념이다. ‘타자’ 개념이 성립하려면 다른 한쪽에 ‘나’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이 ‘나’는 누구인가? 기존 수필에서 화자인 ‘나’가 서정적 화자로서 정서와 사고를 독립적으로 이끄는 동일성의 자아로 이해되었다면, 이 글에서 조명하려는 ‘타자’의 반대 항으로서의 ‘나’는 ‘주체’로 구성되어간다. 어떤 실체나 고정점에 정박하지 않은, 언제나 구성되는 과정 중에 있는 주체는 내부적으로 (의식과 무의식으로) 분열되어있는 불안정한 존재이다. 하지만 이 ‘나’는 불안정하기 때문에 오히려 뜻밖의 만남이나 사건을 통해 자신을 능동적으로 바꿀 가능성을 갖고 있다.


  대상이나 심경, 추억 등의 부딪침을 통해 ‘나’는 “붓 가는 대로” 글을 써나가는 과정에서 변화하게 된다. 김광섭의「소고」를 다시 읽으면서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진실을 만들어가는 불완전하지만 열린 주체로서의 성찰적 ‘나’라는 화자를 수필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이제 수필은 주체가 ‘타자’와의 조우를 통해 사물과 세상을 향한 성찰적 시각을 얻는 ‘사건’이 일어나는 문학적 ‘장소(place)’가 된다.


 삶은 본원적으로 낯설다. 탄생의 순간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생경함을 표현한다. 어떤 삶이라도 본래 낯선 것이라면, 이 낯 섬이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붓을 잡게” 만든다.


우리는 늘 ‘타자’와 부딪친다. ‘타자’는 낯선 삶 속에서 만나는 사람, 사물, 어떤 상황일 때도 있고 내면 자아일 때도 있다. 어떤 것이든 주체는 삶에 대한 본원적 소외와 이질감, 내면적 갈등과 변화의 첨예한 현장에 놓이게 된다. 낯선 만남 앞에서 “스스로 붓을 들어” 수필을 쓸 때 시나 소설을 쓰는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나’를 변화시킬 수 있다.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분석의 대상이 된 ‘나’는 자아와 세상을 성찰적 시각에서 바라볼 위치를 얻기 때문이다.      

     

수필의 맛은 어떠한 시간에 어떠한 문제나 어떠한 대상에 작가의 기분이 부딪쳐서 표현되는 인간미에 있다.

 - 김광섭, 「수필문학 소고」(인용 자강조)

     

*

‘부딪치다’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또는 둘 이상의 사람이나 사물이) 힘 있게 닿아지다”라는 뜻을 담고 있는 ‘부딪다’의 능동적 형태이다. ‘부딪히다’는 이와 달리 수동적 형태이다. 주어의 행위에 따라 능동인지 수동인지 구별해서 사용된다. 김광섭의 글에서 능동적 의미의 ‘부딪치다’가 사용된 것은 따라서 수필 작법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이 글은 수년전 수필평론으로 모 일간지의 문학상을 받은 글로, 그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새벽 산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