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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 은 Mar 15. 2019

새벽 산책

부딪치는 글쓰기로서의 수필 - 리뷰1


  아직도 어둠이 검북 청색으로 어른거리고 있는 새벽에 “물기 어린 공기”를 느끼며 화자는 산책을 시작한다. 걷기와 여행은 수필의 단골 소재이다. 존재론적으로 이미 고향을 상실한 주체는 반복해서 어디론가 떠나려고 한다. 새로 정착한 곳은 삶의 터전일지언정 고향은 될 수 없다. 하지만 돌아갈 고향은 없다. 주체에게 고향은 이미 잃은 상태이므로. 낯선 곳을 향해 정처 없이 떠나고 어디에도 없는 마음의 고향을 찾으려 하는, 정주하지 못하는 영혼이 본의 아니게 생활에 묶여 떠나지 못할 땐 낯익은 거리로 나간다.


  이 수필의 화자는 주치의의 조언에 따라 산책을 하게 되었다고 밝힌다. 마치 산책이 일이나 의무인 듯이 말하지만 하루를 시작하는 새벽에 대한 묘사는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산책이 어떤 존재의 부름에 부응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검북 청색 어두움이 서성이는 신새벽에 문을 밀고 밖에 나왔다. 물기 어린 공기가 뺨에 와 닿는다. 잔디밭으로 내려섰다. 젖은 양탄자를 밟은 양 발바닥이 포근하게 물이 차오른다. 아침 이슬이 흠뻑 내려와 주었는가 보다.

 싼페드로(San Pedro) 항구 쪽이 수줍은 복숭아 빛으로 물드는가 했더니 차차 오래가 붉은색으로 넓게 번져나간다. 바야흐로 여명이 시작되는 참이다."

     

해 뜨는 장면이 눈에 선하다. “수줍은” 복숭아 빛이 어떤 색인지 궁금해진다. 당장이라도 여명의 순간을 목도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글이다. 


이 글에서의 여명은 '싼페드로 항구'라는 특정 지명의 것이다. 매일 아침 세계 곳곳에서 여명이 시작되지만, 이 글에선 화자가 딛고 선 땅의 여명이 구체적으로 느껴진다. “물기 어린 공기”나 “포근하게 차오른다”는 표현은 구체적 장소의 시간적 변화, 자연적 변화를 생생하게 포착하려는 시도이다.


  이 지방색 짙은 여명의 순간은 이 글에 고유한 정취를 부여해준다. 흔히 수필에서 등장하는 산책하는 화자의 시선과 상념이 자신의 감흥이나 감정에 빠져있을 때 풍경이나 대상은 구체성이나 고유성을 잃게 된다. 


정옥희의 글에선 풍경이 화자를 부른다. 화자는 여명의 새벽에 부딪쳐서 산책을 나간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주섬거리며 옷을 챙겨 입고 운동화도 찾아 신었다. 집 둘레를 한 바퀴  걸을 참이었다. 엊그제 주치의 오박사는 나에게 콜레스테롤 수치가 좀 높으니 걸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진찰 시 매듭이 굵은 손을 내밀며 주춤거리자 젊은 의사는 서슴없이 말했다. '이 손은 자랑스러운 손이지 부끄러운 손은 아니지 않습니까?' 했다. 요즘의 젊은이 중에도 저렇게 사려 깊은 말을 할 줄 아는 이도 있구나 싶어 가상하게 느껴졌다."

     

노동으로 굵어진 손을 내미는데 주춤하는 화자에게 자랑스러운 손이라고 말해준 주치의를 고마워한다. 여명의 새벽이 산책의 흥을 돋우고 그 흥이 주치의를 떠올리게 되는 과정은 맺힌 데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이런 자유 연상은 아이비(Ivy) 줄기가 너무 변화가 없어서 싫다는 개인적 감정표현과 화자를 졸졸 쫓아오던 집개의 이야기로 계속 이어진다. 아이비와 개에 관련된 대목을 꼼꼼히 살펴보면 간단치 않은 복선이 깔려있다. 가령 아이비가 “게으른 사람의 풀꽃”이라 싫다고 하는 대목은 세상의 변화에 뒤쳐져 있는 화자 자신에 대한 반성과 연결된다. 


이어지는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변해가는 세상을 감당할 수 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화자는 변화에 사려 깊게 반응한다.  개를 쫓는 대목은 “머리끝이 쭈뼛 곤두서는” 느낌으로 시작한다.

     

"길모퉁이를 도는데 서걱거리며 누군가가 내 뒤를 밟는 것같이 느껴졌다. 머리끝이 쭈뼛 곤두선다. 뒤를 돌아다보았다. 내 집의 점박이 작은 개였다. (...) 그렇게 개를 쫓느라고 나는 집까지 되돌아와야만 했다."

     

  여명이 깔린, 아직 어둑한 시간 인적 드문 길에서 산책은 불안하다. 뒤따라오는 것이 자신의 개라고 확인했을 때 두려움은 안도감으로 바뀌지만, 한적한 교외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에 대한 경계심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이후 화자는 산책길에서 두어 번 사람들과 마주치고 남의 집 개도 보게 된다.


 이런 대목들은 짐짓 안정된 중산층 교외 주택가의 흔한 정경이지만 그 이면에는 선과 악, 행과 불행, 안정과 불안, 권태와 긴장 등의 이원적 가치들에 대한 화자의 예민한 시각이 스며있다.


  화자는 산책 중에 두 번 ‘부딪친다.’ 한 번은 두 명의 젊은 남자가 뒤에서 걸어와 화자가 자리를 내어준다. 앞서 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데 뭔가 심상치 않다. 그들이 꺾어 돌아간 산책로를 들여다보니 두 남자가 손을 잡고 있었다. 이 장면에서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윌로우 스프링 트레일(Willow Spring Trail) 말길로 꺾어 내려가고 있었다. 나도 늘 이 길로 들어가 보고 싶었으나 가파르고 골이 깊어 무서워서 용기가 나지 않던 곳이었다. 그들을 따라 들어갈까 하다가 두 젊은이가 손을 꼭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걸으며 내 인생은 늘 제자리걸음으로 살아온 것을 새삼 느꼈다. 세상은 많이 변해있는 것을. 누구나가 스트릭(Strict)하다고 공인하는 이 산속 오지에도 새로운 변화의 물결은 이미 들어와 있지 아니한가."

     

집에서 나와 보니 많이 변한 세상이 하나씩 나타난다. 화자에 의하면 “스트릭(strict)” 한 “산속 오지”가 자신의 생활터전인데 그곳까지 밀고 들어온 변화의 물결-- 이 경우엔 동성애자 커플 -- 을 거스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체념적 수용이라고 하기에는 넉넉하고 유연한 시각이 엿보인다.


  두 남자가 사라진 산책로는 화자가 늘 가보고 싶었으나 무서워서 용기가 없어 가지 못했던 곳이다. 그곳은 가파르고 골이 깊어 무섭지만 들어가 보면 어떤 변화를 경험할 만한 곳이다. 마치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을 연상케 하는 이 대목에서 프로스트의 시적 화자와 달리 이 수필의 화자는 그 길로 가지 않았다. 아마도 두 남자에게 그 장소를 조용히 내어주려는 의도였는지 모른다. 그 길은 손을 잡은 두 남자들을 위한 것이지 화자의 것이 아니라고 선을 긋는 것이기도 하다. 두 손을 잡은 남자들이 걸어 들어간 그곳은 화자에겐 금지되지 않은 금지구역으로 남아있다.

 

   두 번째 부딪침은 오르막길에서 내려오다가 만난 한 여인이다. 처음 보기에 그녀는 “히스패닉 같기도 하고 동양계 같기도” 하다. 여인은 자신을 남미에서 오래 살았던 중국계 소설가로 소개했다. 화자는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낯선 이와 마주할 때 남녀의 성과 인종에 근거한 구별 짓기가 몸에 밴 사람이다. 


이 글에서 화자는 두 차례에 걸쳐 변해가는 세상의 타자들에 대한 무의식적 선입견을 드러낸다. 선입견은 불가피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화자가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제자리걸음”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게다가 이 두 번째 일화에서는 중국계 여성과 화자 사이에 발견된 공통 이해관계 -- 작가라는 사실과 일본을 싫어한다는 점--를 찾아서 구별 짓기에 따르는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나름 노력한다.


  한편 화자는 변해가는 세상과 부딪칠 때 자신의 고집을 굽히지 않기도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쌍꺼풀 수술을 권했던 안과의사가 떠오른다. 나이가 들어 눈이 시려오고 눈물이 자꾸 나오지만 화자는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 해도 쌍꺼풀 수술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여전히 타협 불가능한 고정관념, 혹은 화자가 지키고 싶은 신념이 있기 마련이다. 쌍꺼풀 수술은 절대 못하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난 화자는 곧이어 땀을 닦으려고 무심코 옷섶 자락을 들어 올린다. 배꼽이 보일까 걱정되지만 이 나이에 어떠랴 하면서 자신이 점점 능글맞아진다고 한다. 


김광섭은 수필이 단지 기록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머”와 “위트”가 필요하다고 했다. 


“수필은 잡다한 모든 것이 그냥 그대로 내용이 될 수 있다 하더라도 단순한 기록에 그쳐서는 우리의 흥미를 긴장시키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는 유머가 있어야 하겠고 위트가 있어야 한다. 전자는 무의식적 소성(素性)에서 피는 꽃 같은 미소요, 후자는 지혜와 총명의 샘과 같다. 이 천성(天性)스런 유머와 보석 같은 위트는 수필의 본성과도 같은 것이다. 만일 이러한 속상을 갖추지 못한다면 수필은 그저 무미건조한 생활적, 심경적 기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김광섭, 「수필문학 소고」)


화자가 자신을 ‘능글맞은 여인’이라 부르는 대목은 유머를 적절히 가미해 자신의 고정관념을 고집하면서도 조금씩 마음의 빗장을 열어가는 화자의 유연한 태도를 밋밋하지 않게 전달해준다.

 

  정옥희는 노년의 처지가 손을 내보이기 어려울 만큼 부끄럽고 책을 읽기 힘들 만큼 불편하며 콜레스테롤 걱정으로 억지 산책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만, 능청스럽게 삶을 관조하고 살면서 전전긍긍했던 터부와 금기도 가끔은 슬쩍 넘길 수 있는 성숙한 주체의 위치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화자는 늙어가는 자신과 통제할 수 없고 이해하기 어렵게 빠르게 변하는 세상 사이의 괴리와 불협화음을 긴장과 여유로 조정해간다.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세상을 받아들이기 -- 이는 타협이 아니다. 포기나 굴복도 아니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 손마디가 굵어지고 눈꺼풀이 내려앉는 육체적 노쇠에도 화자는 자신이 그어놓은 선을 훌쩍 넘지 않으면서도 서서히 시선을 밖으로 향한다. 이런 화자의 태도는 마지막에 카터 대통령처럼 환하게 웃는 장면에 담겨있다.

     

"앞뜰에 닿았을 때는 내 입에서 단김이 뿜어져 나왔다. 두 손녀가 손나 팔을 불고 있었다. '하알머니이...' 아이들을 보고 즐거워진 나는 카터 대통령의 웃음 스타일로 앞니 열두 개가 다 보이도록 웃는다."    

 

이미 해는 중천에 떠 있고 안개는 걷혔다. 새벽안개가 그녀가 살아온 인생의 터널 같은 것이라면 산책을 마친 아침 10시는 그녀가 세상과 부딪치고 돌아온 환한 시간이다.

   

   



*정옥희 수필집, 『로우링 힐스의 여인들』 (2000: 동화서적)에 수록된 <싼페드로 항구가 여는 아침>을 분석한 것으로 모 일간지 평론 당선작 중 일부를 브런치에 맞게 수정했습니다. '싼페드로'라는 지명과 일부 표준맞춤법에 어긋나는 표현은 인용된 작가의 문장이므로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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