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 은 Mar 26. 2019

새들은 떠나고

부딪치는 글쓰기로서의 수필 - 리뷰 2

"날개"라는 제목을 들으면 한국의 독자는 의례 이 상의 소설을 떠올리겠지만, 여기서 소개할 글은 동명의 수필이다.

  

 박봉진의 수필「날개」는 낯선 대상과의 부딪침으로부터 저절로 흘러간다. 하지만 그 자연스러움은 단순하지 않다. 화자는 어느 날 오후 예기치 않은 대상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선입견 탓에 연달아 일어난 착각을 반성하게 된다. 화자가 새를 날려 보내면서 자신의 착각에도 날개를 달아 날려 보내기까지 두 가지 일화가 시청각적 이미지로 정교하게 구성되어 의미를 직조한다.


 첫 번째 일화는 외출 준비로 부산한 아내의 소리로 시작된다.

     

아내의 외출은 집안에 작은 소란을 피우고 나서 시작된다. 웬만큼의 세월을 살았건만, 분주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헤어드라이어 돌아가는 소리, 병뚜껑 딸각거리는 소리, 옷장 문 여닫는 소리(...) 종종걸음으로 화장실과 부엌 순례를 끝내고도, 몇 차례 현관문이 퉁탕거린 후에야 겨우 바람 분 뒷날처럼 집안이 조용해진다(16쪽).

     

아내가 전면에 등장하거나 화자에게 응대하는 직접적 묘사가 없는데도 화자의 귀에 들려오는 소리만으로도 아내의 존재는 크다. 화자는 옷시중을 해달 라거나 차 시동을 걸어달라는 아내의 부탁에 짐짓 불평하고 있지만 종종 대며 집 안팎을 분주히 돌아다니는 아내를 은근한 사랑을 담아 묘사한다. 무엇보다 아내가 외출 준비하면서 만들어내는 소리들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섬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위에 인용한 대목은 이 수필의 서두로, 여기서 묘사되는 아내의 모습은 우연이 아니다. 아내는 마치 새처럼 움직인다. 새 한 마리가 집안에 들어와 “딸각거리고” “종종”, “퉁탕”거리는 것처럼 들린다. 아내에 대한 이러한 청각적 묘사는 두 번째 일화로 연결된다. 


아내가 외출한 뒤 얼마 안 있어 또다시 “토닥거리는 소리”가 난다. 이 소리를 들으면서 화자는 아내가 또 칠칠치 못하게 뭔가를 빠트린 것으로 넘겨짚는다. 부주의한 아내가 못마땅해서 아내를 들여다보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 소리는 없어지지 않는다. 급기야 화자는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해주려고 집안으로 들어서는데, 그곳에 아내는 없고, 새 한 마리가 부엌 창문에 붙어서 “푸닥거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거실 바닥에도 한 마리가 떨어져 있었다. 화자는 두 마리의 새를 보면서 여전히 아내 탓을 한다. 아내가 정신없이 나가다 문을 열어놓았다고 넘겨짚는다. 아내는 종종 뒷문을 닫는 것을 잊곤 했었고 그때마다 벌새가 들어와서 한바탕 소란을 일으켰다. 파섬(possum)이 들어왔을 때는 아내가 혼절까지 하지 않았던가. 화자는 지난 일을 들먹이면서까지 아내를 질책한다.


 하지만 화자의 착각이었다.

     

나는 거실의 소파를 돌아서 현관문 쪽으로 갔다. 그런데 이제 어찌 된 영문일까? 현관문은 닫혀 있었고, 새가 들어왔을 만한 데는 아무 데도 없었다. 나는 내 정신을 의심하려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흔들어보고, 손등으로 눈꺼풀을 문질러 보기도 했다(18쪽).

     

마치 환상 지대(twilight zone)로 들어간 듯하다. 눈을 비벼 볼 정도로 믿기 어려운 상황을 주체가 맞닥뜨린 것이다. 어떤 대상이 현실 구조 바깥에서 들어와 글의 흐름을 바꿔버렸다. 주체가 타자와 마주치는 ‘사건’은 이 장면에서처럼 비현실적인 환상처럼 느껴지면서 현실적 시공간을 낯설게 만든다.


화자는 이 환상 지대를 통과하면서 성찰적 자아로 변해간다. 아내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킨 심리적 착각과 달리 여기서 화자는 물리적 ‘착각’을 경험한다. 


화자의 성찰은 이 착각에서 벗어나 “어쨌든 새를 먼저 집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는 현실적 판단에 출발한다. 거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새를 조심스레 손에 집어 들면서 화자는 절대자와 인간의 관계를 떠올린다. 이 상황에서 ‘절대자’인 화자의 손에 잡힌 미약한 존재인 새는 화자가 안전하게 날려 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새는 마치 절대자의 의도를 헤아리지 못하는 인간과도 같다. 화자는 한때 절대자의 뜻을 모르고 방황했던 자신을 떠올린다. 새에게 압박을 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루면서 화자는 좋은 의도를 갖고 있더라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게 되기도 하는 인간관계의 아이러니를 사색한다.


 화자는 새를 동쪽으로 날려주고 나서 두 번째 새를 잡으러 들어온다. 종작없이 날아다니는 새를 잡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화자는 허둥댄다.

     

거실에서 이리저리 나는 통에 몇 번이나 유리창문을 들이받았고 가구 위의 작은 액자들을 넘어뜨렸다. 새의 소란도 파업 궐기같이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것일까. 작은 흔들림 후에 큰 흔들림이 뒤따르는 지진처럼 여기저기서 불쑥거렸다.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19쪽).

     

새를 잡으러 여기저기 부딪히고 소란을 떠는 와중에 알 수 없는 연쇄반응 같은 움직임이 느껴진다. 화자는 멈춰서 상황 파악을 한다. 알고 보니 파이어 프레스 안에 들어있던 새들의 움직임이었다. 화자의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새가 집안에 들어와 있던 것이다. 이제 모두 여덟 마리의 새가 방 안으로 날아 들어와 푸닥거리기 시작했다. 손으로 하나씩 잡기가 어려워져 뜰채로 한 마리씩 잡아 모두 같은 방향인 동쪽으로 날려 보낸다. 길 잃지 않고 서로 잘 만나서 함께 여행을 떠나라는 마음 씀씀이다. 여기까지가 두 번째 일화의 끝이다.


  새들이 어디서 어떻게 들어왔는지 미스터리는 풀린 셈이다. 적어도 현실적 설명은 가능해졌다. 하지만 비현실적 환상의 경험은 여전히 남아있다. 처음 새의 출현을 목격하던 순간부터 여러 마리의 새들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장면까지를 화자의 심리적 상태의 객관화라고 볼 수 있다. 


텅 빈 집에 남게 된 화자가 이유 없이 아내를 트집 잡았던 마음이 새들의 출현으로 출렁인다. 화자의 사유는 아내에 대한 속 좁은 착각에서 비롯되어 새들이 불러일으킨 ‘착각(혹은 환상)’을 가로지르고 나면, 수필 전체를 두고 볼 때 얼핏 사족처럼 보이는 한 대목에 이르러 환경론자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점점 투기대상이 되어 사라져 가는 자연과 미국 초기의 식민 역사를 아우르면서(19-20쪽) 피와 편견으로 물든 미국 땅의 역사로 종횡무진 확대된다. 


새들의 갑작스러운 출현이라는 부딪침이 이끄는 대로 붓을 집어 들고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넘나들며 무심한 듯 글을 써감으로써 김광섭의 ‘무형식의 형식’을 획득한 것이다.  


이제 새들이 떠나고 남아있는 집안은 아수라장이 되어있다.

     

그놈들이 파이어 프레이스 안의 그을음을 풀무처럼 날갯짓으로 마구 불어냈고, 또 몸에 묻혀서 사방으로 날아다녔기 때문에 거실 바닥과 창문틀엔 새까맣게 그을음이 앉았고 매일 아내가 먼지를 터는 아이보리색 가죽소파 역시 온통 그을음을 뒤집어썼다(21쪽).

     

사태는 바뀌어 있었다. 화자가 아내에게 잘못을 저지른 처지가 된 것이다. 이를 화자는 모두 순전한 자신의 착각 때문이라고 한다. 아내가 느리고 잘 잊는다는 선입견과 새들이 들어온 것을 몰라 신속히 처리 못한 자신의 탓이다. 화자의 깨달음은 개발주의자나 백인 정복자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도 상통한다. 모두 선입견과 편견, 상대방에 대한 ‘착각’에서 비롯된 해악이기 때문이다. 이제 화자는 이런 사색의 과정을 거쳐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이 고집스러운 착각에 날개를 달아 날려 보낼 준비를 한다.

     

그 착각이란 것은 때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가면 좀체 움직이려 하지 않는 것이 탈이다. 그러나 마음먹기 따라서는 신속히 날려 보낼 수 있는 가변의 날개를 달수 있지 않는가. 그 기미가 언뜻 보이기만 하면 나는 지체 없이 그것에 날개를 달아 줄 테다. 후회는 행위에 매여서 끈처럼 뒤따라 올 텐데 그것에 앞서면 모두가 편안할 테니 말이다(21쪽).     

     

이 수필은 통상 디아스포라 문학이 보여주는 천편일률적인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나 상실감, 향수 어린 추억 혹은 이민생활의 고된 노동과 박탈감 등을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직접 다루지 않았다고 해서 이런 내용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가령 이 글에는 아이들이 타 도시로 떠나 부부만 남은 집이라는 공간이 있다. 새를 잡느라 분주한 어느 노쇠한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상상하는 독자는 어느새 그 빈 공간의 적막함을 느끼게 된다.


 이 적막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사건은 이미 갈등과 상처를 겪어 지나온, 세월의 풍파를 거쳐 온, 인생을 살만큼 살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표면적으로 정적인 삶에도 여전히 부딪침은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꿈을 이룬 인간의 삶에도 부딪침은 일어난다. 사건은 중단되지 않는다. 


수필은 이 삶의 진실에 대한 기록이자 사색이다. 



수필 <날개>는 박봉진 수필집, 『언제나 내 마음 바다에 살아』 (2004: 선우미디어)에 수록됨 




* 이 글은 모 일간지에 수필 평론으로 실린 글의 일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랍스터를 생각해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