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래스카에도 일상은 있다 2
나는 매일 걷는다.
길은 알래스카 내륙도시를 구획하면서 사방으로 이어진다. 시 외곽뿐 아니라 시 안쪽에도 곳곳에 툰드라 숲이 놓여있다. 숲은 인간이 놓은 도로에 의해 소외된 채 여기저기 웅크리고 있다. 어둡고 습한, 필경 야생동물들이 바쁘게 움직일 숲 가를 따라 걷는다. 숲과 나는 평행이다. 그 평행 거리만큼 야생이 도시와 공존한다.
실제로 이 도시에는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산책을 하는 사람들, 관광 온 사람들 정도라면 특이할 것이 없다. 내 눈을 끄는 사람들은 이들이 아니다.
교통수단으로써 걷기를 하는 사람들. 걸어야만 하는 사람들. 대형슈퍼마켓 부근에서 이런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자동차가 속도감 있게 지나는 도로 옆으로 인도를 따라 한 사람이 걸어간다. 그의 손에는 슈퍼마켓 로고가 박힌 플라스틱 봉지가 서 너개 들려있다. 그는 터벅터벅 집으로 걸어간다. 일용할 양식을 손에 들고서. 그의 집은 어디일까.
수퍼마켓 봉투를 들고 길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여느 대도시에서도 물론 만날 수 있다. 캘리포니아의 산타모니카라는 해변도시의 분주한 도로를 떠올려보자. 이 도시에 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차도가 주택가를 종횡무진 달린다. 대부분 이런 도시에선 주택가로부터 몇 블록 채 안가서 상가가 이어진다. 아침에 일어나 슬리퍼를 신고 어슬렁어슬렁 근처 커피숍에 가서 모닝커피를 마시거나 그 옆의 베이글 전문숍에서 막 구워 낸 따뜻한 베이글에 하얀 크림치즈를 듬뿍 발라 아침으로 먹을 수 있다. 집으로 다시 어슬렁어슬렁 돌아오는 길에 아침 신문을 사들고 올지도 모른다.
할리우드 영화에나 나올 법한 거리 산책의 여유 있는 장면이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허락되진 않는다. 이 극지의 외딴 도시에서 쇼핑 봉지를 들고 걷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어디에도 없을 종착지를 향해 하염없이 걸을지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끼니를 챙기기 위해서는 누구나처럼 장을 봐야 하지만 그들에겐 자신의 거처에서 2마일 혹은 3마일 또는 그 이상 떨어진 슈퍼마켓까지 걸어가는 방법 이외엔 다른 교통수단이 없다.
방금 이 문장을 읽었다면 가만히, 잠시 그 장면을 상상해보길 바란다.
어린 시절 살던, 지금은 서촌이라 불리는 곳의 그 집은 신기하게도 바로 옆에 구멍가게보다 조금 큰 상점이 있었다. 동네 아이들이 과자와 사탕 등 군것질거리를 사러 몰려들었지만 저녁 끼니를 위한 간단한 야채 두부 등 식거리도 팔았었다. 나는 종종 할머니 심부름으로 그곳에 가서 이런저런 찬거리를 사곤 했다. 서촌이 '서촌'이 아니었던 시절, 찬거리를 사러 '후딱 다녀온다'는 표현이 생생한 일상의 한 모습이었던 때의 기억이다.
이 도시에서 발견하는 쇼핑 비닐봉지를 들고 인도를 걷는 사람들은 적어도 내 기억 속 낭만적 유년시절의 한 장면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들을 보면서 낭만적 감상에 빠질 수는 없다. 배경도 기후도 다르기도 하지만 그들의 걷는 모습은 저녁 찬거리로 콩나물과, 막 떨어진 간장을 사러 마실 가듯 나가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내가 있는 이 언덕 위 캠퍼스에 어슬렁대는 학생들을 보면서 간혹 저들은 어디서 오늘 저녁 찬거리를 살까, 가끔 속으로 생각한다. 차가 없다면 찬거리를 사러 걸어가기엔 다소 먼 길이다. 갈 때는 운동삼아 걸어간다고 해도 무거운 쇼핑 봉지를 들고 돌아오는 길은 운동이라기보다는 극기훈련에 가까운 체력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걸어서 수퍼에 다니는 사람들의 손에는 늘 한 두 개의 가벼운 봉지만 들려 있었다. 그 홀쭉한 봉지 안에 든 찬거리는 아마 없으면 안 되는 생필품 정도이겠지. 그렇게 매번 걸어서 생필품을 사야 한다면 매일 그 찬거리 여정을 떠나는 걸까. 자동차를 운전해서 장을 보러 갈 때 카트 한가득 십 수개의 봉지와 때론 커다란 상자와 무거운 식수병으로 채워 나와 트렁크에 옮겨 담고 집으로 실어오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이 가벼운 끼니의 봉투를 들고 걷는 사람의 발걸음이 무겁게 여겨지는 것은 오직 나만의 상상일 뿐일까.
대도시에서도 종종 이와 비슷한 장면과 마주치곤 했다. 가령 이럴 때이다. 등하교시 학교에 데려다 줄 어른이 없거나 어른이 있어도 차가 없는 경우 아이들은 학교와 집 사이의 거리를 걸어 다녀야 한다. 미국의 학교에서 벌어지는 매우 일상적이며 흔한 장면인 하굣길 학교 주변에 죽 늘어선 그 다양한 자동차들. 아이들이 학교 수업이 끝나 나오기를 기다리는 학부모들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자신을 픽업하러 올 어른이 없어서 학교 주변을 배회하거나 무작정 걸어가야 하는 아이들이 있다. 그들은 가방을 메고 근처 도서관이나 카페, 패스트푸드점으로 뿔뿔이 흩어지거나 집으로 향해 걷는다.
도시에서 이들의 걷기란 자발적이지 않다. 도시의 거리를 걸어간다는 것은 통상 매우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일이다. 건강을 위한 세련된 선택이거나, 목적의식이 분명하게 발을 뻗는 행위이다. 생존과 필요에 의한 걷기 역시 목적의식적이지만, 자발적 선택은 아니다. 이런 걷기는 따라서 피곤함을 동반한다. 그들에겐 어떤 이유에서든 익숙한 문명의 이기가 허락되지 않았다. 그들의 사연이 무엇이든 이런 종류의 걷기가 눈에 띄면 잠시 평가나 판단을 보류해본다.
걷는다는 것이 건강과 활기찬 생활의 이미지로 기호화된 현대적 삶 속에서 걷는 행위가 지향하는 건강과 낭만은 그에 어울리는 기후와 도로조건이 보장되어야 한다. 반면 바깥 기온이 영하 20도 이하로 떨어지는 곳에서 걷기란 때론 목숨까진 아니어도 건강을 담보하고 감행해야 하는 생존의 선택이다. 물론 겨울 한 철 동안이지만 딱하게도 이곳의 겨울은 짧아야 6개월, 길면 8개월이다. 그래선지 겨울의 끝에 봄기운이 피어나면 어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나 싶게 너도나도 밖으로 나와 걷고 뛰고 자전거로 달린다. 해가 오래 비추는 계절엔 마치 이 도시도 여느 도시처럼 건강과 낭만을 추구하는 듯이 보인다. 마치 이 도시 몫의 한여름밤의 꿈같다.
걷는 행위를 떠올릴 때면 어렸을 때 읽었던 토마스 하디의 소설 <테스>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테스는 먼 길을 하염없이 걸어갔었다. 마차도 말도 혹은 그 흔한 바퀴 달린 물건을 타지 않고 말이다. 테스의 일생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그녀의 걷기가 참 고되고 스산했다는 걸 이해할 것이다.
빠른 속도로 시간을 달리는 움직이는 기계들에 올라탄 사람들과, 기꺼이 수 천 마일의 순례길을 나서는 사람들, 매일 걷거나 달리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이 시대에 어느 외딴곳에선, 혹은 번잡한 도시 한 복판의 길에서 누군가 일상을 버텨내며 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