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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 은 Mar 24. 2019

귀가

 알래스카에도 일상은 있다 3

                     


  어느 해 겨울 이십 여 일 간의 연말 여행을 마치고 새벽 비행기로 알래스카의 페어뱅크스 공항에 도착했던 때가 떠오른다. 오래전 동부에서 시작한 미국 생활은 수 세기 전 아메리카 대륙의 정착민들이 거쳐 간 행로를 따라가듯 서부 캘리포니아를 거쳐 ‘최후의 프런티어’라 불리는 알래스카에 이르게 되었다. 자신이 가야 할 곳을 본능적으로 알고 날개 짓을 하는 새와 달리 나는 지금까지 선택과 우연의 교차점에서 둥지를 틀곤 했다. 얼마나 더 짓고 부수고 새로 짓기를 반복해야 마침내 정착할 수 있을까. 대답 없는 이 질문이 마음속에 똬리 틀기 시작하던 당시 알래스카를 내‘집’으로 삼은 지 몇 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연말 여행을 핑계로 따듯한 기후를 찾아 떠났었다.

   알래스카에서 보낸 첫겨울이었다. 8월 중순부터 서늘해지더니 폭설이 서너 차례 이어지고 11월부터는 정오가 되어서야 겨우 해가 떴다. 여러 번 간청한 뒤에야 겨우 나와 마지못해 한두 시간쯤 앉아 있다가 휑하니 자리를 뜨는 냉정한 애인처럼 해가 사라지고 나면 꽁꽁 얼어붙은 어둠이 마음 깊숙한 비밀의 골방에까지 들어차 버렸다. 한낮에도 두꺼운 바지 속 두 다리는 얼어서 무감각해졌고 장갑을 껴도 열 손가락은 손끝까지 얼어붙어 실외에서는 단 몇 분도 버티기 어려운 혹한의 겨울이 수개월 지속되었다.  

   그 첫겨울 나는 시시각각 마치 유리 공 속 마을에 서 있는 작은 피규어처럼 동토의 땅 알래스카의 풍경 속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사나흘 멈추지 않고 눈이 내릴 때면 잿빛 구름이 한 조각의 틈도 없이 하늘을 꽉 틀어막고 놓아주지 않았다. 눈이 마침내 그치면 화씨(Fahrenheit) 영하 30도를 호가하는 추위로 탓에 땅 위에 쌓인 눈은 녹을 새도 없이 꽁꽁 얼어붙어 버렸다. 세상은 바야흐로 백색 얼음궁전이 변해갔고 나는 비현실적인 계절 앞에서 하얗게 질린 채 연말 연휴가 시작되자마자 변심한 애인의 기억을 쫒듯 서둘러 여행가방을 꾸려 따듯한 곳을 찾아 떠났다. 

  여행에서 돌아오던 날 자정이 얼마 지나지 않은 암흑의 시간에 공항 창가에 서 서 이곳을 떠나 남쪽으로 향하기 직전 끼루룩 끼루룩 울며 11월의 스산한 벌판을 서성이던 지난 늦가을 철새 떼를 생각했다.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택시는 한 대도 없었다. 나는 이 도시로 돌아와야 했다. 겨울 철새가 모두 떠난 이 황량한 툰드라의 야생 한가운데 나트륨 불빛 속 공항은 정적에 싸여 있었다.  

  마침내 택시 한 대가 서서히 다가와 멈췄다. 운전석에서 누군가 내려 내 이름을 호명했다. 전화로 예약했던 택시였다. 이름이 불리자 나는 자동적으로 여행 가방을 밀고 그에게 다가갔다. 택시 운전수 얼굴이 낯익었다. 몇 주 전 나를 공항에 실어다 준 택시를 몰던 운전수였다. 서로 알아보곤 반가워했다. 그의 이름을 물었다. 재커리. 예루살렘이 희망의 땅이 될 것이라 예언한 선지자의 이름이다. 스마트폰에 남아있던 전화번호에 그의 이름 철자를 하나하나 입력하고 저장했다. 알래스카 지역번호 907로 시작하는 전화번호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었다. 

  알래스카로 이사한다고 하니 지인들은 크루즈 여행 경험담을 전해주었다. 알래스카가 자신의‘이상향’이라고 몽환적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이는 미국 남쪽에서 출발해서 알래스카를 향해 캐나다 서부를 서북방향으로 종단했던 자동차 여행 이야기를 했다. 방법은 달라도 이들에게 알래스카는 지상낙원으로 이상화된 관광지였다. 하지만 내게 알래스카는 백야의 여름 추억 속 여행지가 아니었다. 하루 두세 시간 겨우 햇빛을 보기 위해 20여 시간 지속되는 어둠을 감당해야 하는 겨울의 나날을 버텨내야 할 척박한 생활터전이었다. 연어잡이와 개썰매, 오로라와 야생 국립공원 등의 유명세 뒤편에서 실제 살아가는 사람들이 궁금해졌다. 

  알래스카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어떻게 알래스카에서 살게 되었는지 묻기 시작한 지 어느덧 2년이 지났다. 지금도 기회만 되면 마켓 계산대의 점원, 공공기관의 직원, 모임에서 우연히 만나는 이들, 누구라 할 것 없이 그들 각자의 알래스카 이야기를 묻게 된다.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 빌은 내가 그 질문을 던진 첫 번째 사람이었다. 

  빌은 오래전 알래스카 주립대로 직장을 얻어 이주해서 몇 년을 살다가 가족을 데리고 다시 자신의 고향인 미국 본토의 중서부 도시로 돌아갔었다. 그 후 몇 년 지나 빌은 옛 직장을 찾아 돌아왔고 알래스카에 영구 정착했다. 직장, 가족, 사업 등의 이유로 이곳에 유입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단기간 지내다 떠나버리지만 간혹 빌과 그의 가족처럼 한번 떠났다가 자발적으로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나는 다시 온 이유가 무엇인지 듣고 싶었다. 무엇이 이들을 알래스카로 부르는가. 빌은 잠시 내 두 눈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여기 이곳, 알래스카에는 뭔가 다른 게 있어요. 미국 땅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어떤 것 말이에요. 

  알래스카, 그중에서도 내륙의 중심부에 위치한 이곳은 알래스카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가 아닌 이상 선뜻 정착하고 싶은 곳은 아니다. 추운 날씨도 그렇지만 미국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왕래하기도 힘든 탓에 물자가 충분하지 않고 문화적으로도 여러모로 뒤처져있다. 물론 도심에는 여느 미국의 소도시와 다를 바 없이 대형마켓과 쇼핑센터, 병원과 학교, 공공시설들이 갖추어 있다. 다만 이런 문명화된 지역은 극히 협소하고 시 중심을 관통하는 고속도로를 따라 30분 정도 자동차로 달려가면 도시 주위를 에워싼 광활한 툰드라 지대를 만나게 된다. 도로로 접근할 수 있는 땅이 전체 면적의 오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 알래스카의 외딴 내륙도시에서 나는 종종 야생의 침묵을 듣게 된다. 

   그 침묵의 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빌의 대답이 울려올 때가 있다. 겨울이 깊어가는 날 오로라가 뜨는 밤이면 검은 하늘에서 잡힐 듯 잡히지 않게 너울대는 푸른 띠를 좇아 차를 달린다. 그때마다 영원한 집을 찾기 위한 노매드적 여정을 이곳에서 마무리한 빌의 선택은 내게 꼬리에 꼬리를 문 질문들이 되어 돌아온다. 알래스카에 있다는 어떤 것, 빌이 발견한 그 무엇은 뭘까. 언젠가 나도 그것을 발견하게 될까. 나는 그것을 발견하기를 바라고 있긴 한가. 빌이 본 알래스카의 그 무엇이 내게 다가올 때 이곳은 영원한 나의 집이 될 것인가. 대체 디아스포라의 여정에는 종착역이란 것이 있는 걸까. 

  그날 밤 달리는 택시 창문 밖으로 얼어붙은 자작나무 숲이 스쳐 지나갔다. 그 너머 희미한 초록의 오로라 빛이 움직이고 있었다. 무척 맑은 밤이었다. 좌석 깊숙이 묻었던 몸을 일으켜 고개를 빼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두운 밤하늘에 흩뿌려진 별들이 내 두 눈 속으로 쑥 빨려 들었다. 북두칠성, 카시오페이아, 오리온 별자리들이 선명했다. 그 주변으로 푸른 물결이 쳤다. 바다의 파도가 밤하늘로 자리를 옮긴 것 같았다. 캘리포니아 사막에서도 물결을 본 적이 있었다. 바람의 흔적이 남긴 모래의 물결. 밤을 가르고 달리는 택시 위로 펼쳐진 하늘에는 초록의 물이 결을 이루고 있었다. 오로라가 한번 출렁일 때마다 내 기억의 호수에도 파문이 일었다. 

  내 지나온 시간의 풍경들이 그렇게 하나씩 겹쳐져 이루는 기억의 물결에 몸을 맡겨두자니 넘실대는 오로라 아래로 집이 보였다. 오로라는 태양에서 오는 빛의 입자가 반사되어 생기는 현상이라고 들었다. 이 캄캄한 하늘 저 편에는 이글거리는 태양이 있다고 알려주는 신호라고 해도 좋았다. 태양이 식지 않는 한 밤이 지나면 낮이 온다는 법칙은 언제나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담고 있는 저 푸르른 빛의 리본.            

  저 멀리 시야에 들어오는 불빛 속에 내가 집이라 부르는 곳이 있었다. 불 꺼진 채 캄캄하고 온기도 없겠지만 내가 들어가서 불 밝히면 따듯해질 곳. 어느 틈에 택시가 그 풍경 속 어딘 가에 멈췄다. 여행 가방을 트렁크에서 내려주고 굿 나잇 인사를 하는 재커리의 얼굴이 가로등 불 아래 환했다. 다음에 또 연락해줘, 재커리가 택시를 몰고 떠나며 남긴 전언 같은 말이 귀에 붙어 있었다.‘다음’이라는 말을 입 속으로 되뇌며 현관문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오로라의 형상이 바뀌어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밤새 불을 밝혀 두었다. 푸른 오로라와 함께 내 집 창문의 불빛도 넘실대며 그렇게 오롯이 풍경의 일부가 되어 근처 야생의 숲 속에, 혹은 저 대로변 어딘가 서성이는 누군가 혹은 어떤 짐승이라도 있어 내 집의 불빛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그들이 떠나온 집을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렇게  비로소 집에 도착했다. 설사 이곳이 종착역이 아니라 간이역이라 해도 이런 풍경 속이라면 괜찮을 것도 같았다. 그리고 여전히 이곳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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