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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 은 Apr 22. 2019

4월

알래스카에도 일상은 있다 4

4월이다.

어제 눈이 내렸다. 며칠 전에도 눈이 내렸고 다음 주에 한차례 더 눈 소식이 있다.


유난히도 따듯한 겨울을 지낸 알래스카는 지난해 10월과 11월 추적추적 내린 여러 차례  비로 시작해서 폭설과 화이트 아웃을 반복하고 한 두 차례 영하 30도로 내려가는 혹독한 날씨를 겪었지만, 올 겨울은 유독 예년보다 기온이 높았다. 따듯한 지방에서 온 이들은 춥지 않은 알래스카를 반겼지만, 알래스카에서 수십 차례 겨울을 나 본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 저었다. 아니다 다를까 지역의 극지대 연구소는 이번 겨울의 '이상기온'이 지역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고 있다.


문명이 밀려오고 저 북쪽의 원유 저장고가 맘대로 파헤쳐졌으며, 기온 상승으로 빙하가 녹아내리는 시절을 견디는 야생에서 순록이라고도 불리는 캐리부는 멸종위기에 있고 사냥철이 되면 전문 사냥꾼 외에도 이곳 원주민들에게 겨울을 날 육류를 제공하던 순하디 순한 무스조차 보기 어렵다. 뭐 그런 게 대수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생명에게는 - 인간을 포함해서 - 지금은 재난과 위기의 시기이다.


알래스카를 현재의 모습으로 만드는데 일등공신 중 하나는 '홈스테드'생활을 하는 일군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문명을 뒤에 두고 야생 한복판으로 들어가 직접 집을 짓고 사냥을 하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간혹 내셔널지오그래픽 이나 디스커버리 채널 등에서 알래스카 관련 다큐나 리얼리티쇼를 통해 이들의 생활방식이 대중에게 소개된다. 최근에는 넷플릭스에서도 이들이 야생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 중에는 금을 찾아 나선 사람도 있고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그곳에 간 사람도 있지만, 대게는 홈스테드 생활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이들이다. 현대적 문명이 들어선 지금의 알래스카에선 이들의 라이프스타일이 간혹 기벽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알래스카가 미국의 주로 편입되기 훨씬 이전에는 홈스테드 형태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툰드라 야생에서 길을 내주었고 사냥과 재배 등 오지에서의 생존 방식을 일구어내었다. 알래스카 땅 중심부에 있는 디날리 국립공원에서 보호구역 안으로 들어가면 홈스테드의 선조들이 남긴 흔적을 볼 수 있다.


인적 드문 자연으로 들어가다 보면 가끔 궁금해진다. 어디를 가나 '길'이 있다. 숲의 길은 '트레일'이라고 불리는데, 그런 길은 이미 누가 만들어놓아야 후세의 우리가 따라 들어갈 수 있는 법이다. 집 근처의 작은 숲에 가봐도 이미 나 있는 익숙한 트레일이 아닌, 나무들이 촘촘히 들어찬 곳에 눈에 띄지 않는 작은 트레일들이 있다.  그런 지름길 같기도 한 그 조그만 트레일들을 따라가면 누구나 볼 수 있는 숲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숲의 정경이 펼쳐진다. 그럴 때면 길을 만드는 건 사람의 본성인가, 싶기도 하다. 길의 흔적이 사람의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아무도 없는 숲이란 그래서 언어적 모순일지도 모른다.


유례없이 따듯한 겨울이란 도시에 사는 사람에겐 다행일 수도 있지만, 홈스테드의 라이프스타일로 살아가는 극지와 오지의 사람들에겐 재난에 가깝다. 가장 큰 문제는 겨우살이에 필요한 저장음식들이 썩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홈스테드 생활에 필수적인 자연 상태에서의 저장 방식이 작동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누군가에겐 주가가 떨어지고 집값이 떨어지는 것이 위기라면, 이들에겐 기후의 변화가 현실적 재난이자 위기인 셈이다.


이렇게 기후변화에 직면하고 있는 알래스카에도 4월은 온다. 그리고 유례없이 따듯하다는 겨울의 끝에도 4월에 어김없이 눈이 왔다. 작년에도 그랬고 재작년에도 그랬다. 3월이면 기온이 올라가고 공기의 내음이 달라진다. 벌써 2월부터 씨앗을 구하고 파종기를 사들이고 3월이면 봄맞이에 한창이다. 뿐만 아니라 3월이 된다는 것은 곧 여름이 온다는 의미이고 알래스카의 여름은 아주 짧지만 강렬하고 달콤하다. 해와 바다와 천지의 울긋불긋한 야생화들의 계절, 해가 지지 않는 때가 오리라는 생각만으로도 설렌다.


그렇게 한참 봄 준비를 하다가 4월에, 때로는 5월에 뜬금없이 눈이 펄펄 내리는 곳이 알래스카이다. 그런 날이면 만나는 사람들과 서로 시선을 교환한다. 눈이 왔어, 어떡하겠어? 여긴 알래스카인데...... 서로가 그런 무언의 인정과 수용하는 마음을 나누게 된다.


올해는 따스한 겨울 탓인지 2월부터 기온이 상승했고 3월은 봄기운이 완연했다. 마음 한구석에선 이상하게도 이렇게 빨리 가버리는 겨울을 붙잡고 싶었다. 벌써 알래스카의 계절 순환에 익숙해졌는가. 어쩐지 앞당겨온 듯한 봄기운을 물리쳐버리고 싶었다. 춥지 않은 겨울이 아쉽고 섭섭했다. 물론 한편으론 여름이 줄 축복을 기다리고는 있지만, 겨울이 겨울답지 못해 3월의 따스한 햇살로 녹아내려 한겨울 쌓인 눈이 만든 진창에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했다.


다시 눈이 내려 그 모든 '이상한' 겨울의 흔적들을 덮어버렸다. 눈 온날 아침 문을 열고 밖에 나가 하얗게 변한 세상에서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4월의 백설을 음미했다.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지금 이 눈은 곧 녹을 것이며 찰나의 여름에 넋을 놓고 있다가도 곧이어 차가운 서리를 맞게 되지만, 그 어김없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잠시, 잠시 가만히 멈추고 싶을 때가 있다. 그 순간 기억이 자리한다.

  




4월의 의미는 무엇일까.

만일 달에 의미가 있다면, 계절에도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말이다.


다소 진부한,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문장을 어려서부터 이 계절마다  듣고 자랐었다. 대학에 들어가 엘리엇의 그 시구가 담긴 시 전체를 읽었을 때 비로소 계절마다 반복되는 그 명언도 아닌, 인용문의 맥락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문장으로 시작하는 엘리엇의 시를 오롯이 이해하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동안 나는 이 시의 첫 7행을 곱씹고 곱씹으면서 그 뜻을 헤아리려고 애썼었다. 그만큼 그 시의 첫 부분은 뭔가 의미가 투명하게 다가오지 않는 것을 담고 있었다. 비로소 그 의미, 아니 그 7행가량의 도입부가 상징과 비유로 표현하려고 했던 시적 정서를  마침내 실감할 수 있게 되자, 시 읽는 일의 의미심장함을 터득하게 되었다.


이쯤에서 엘리엇의 시를 직접 인용해야겠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이 피어나고

기억과 욕망이 한데 섞이며

둔감해진 뿌리들이 봄비를 맞아 꿈틀댄다.

망각의 눈으로 땅을 뒤덮었던 겨울은

우리를 따듯하게 해 주었고

메마른 구근으로 미약한 목숨을 연명했다.

             --- 엘리엇, <황무지> 중


이 시의 제목은 '황무지'이고, 총 5부로 구성된 시에서 이 도입부가 들어있는 1부의 제목은 '죽은 자의 매장'이다. 시는 4월이 되어 봄기운이 퍼지며 꽃이 필 것이고 생명이 다시 꿈틀거리는 계절을 '잔인하다'라고 한다. 망각의 눈은 도리어 우리를 따듯하게 해 주었다. 목숨을 연명하며 망각 속에 웅크리고 있던 몸을 털어내어 다시 생명의 피를 순환시키는 과정은 환영할만한 초대가 아니라 잔인한 고통이다. 겨울의 망각으로 자꾸 빠져들고 싶은 존재가 뿌리를 뻗고 생명을 발산하기 위해 불가피한 산고인 셈인데, 그 계절의 4월은 잔인할 수밖에 없다. 엘리옷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선 시의 구체적 맥락, 시대와 공간을 이해해야 한다. 20세기 초엽 서구 문명은 현대화 과정에 진입했다. 19세기까지의 지배적 가치가 변화되는 시기였다. 제목이 암시하듯 황무지 같은 불모의 현대문명에서 죽은 자들을 불러내는 일, 즉 문명의 재생과정이 지난하고 고통스럽다는 엘리옷 나름의 시적 윤리가 담긴 시이다.


물론 이상의 내용은 시를 분석하고 학습한 뒤에 얻은 지식이자 시적 해석이다. 4월의 잔인함을 이해하고 나서도 내겐 와 닿지 않은 것은 그 시절 서울의 4월은 잔인함보다는 미풍과 눈부신 햇살, 자잘한 꽃잎들이 날리는 나른한 여유가 가득한 봄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생명은 만개해있었으니, 부활의 고통은 이미 과거였다. 여전히 삶은 함성과 고함, 깃발과 운동화 발자국으로 힘겨웠지만, 꽃은 너무도 화사했다.  


엘리옷의 4월을 겪은 것은 이방의 땅에서 전혀 다른 기후와 계절의 흐름에 적응해갈 때였다. 3월이 되어도 꽁꽁 언 땅을 밟아야 했고 시도 때도 없이 닥치는 눈발과 냉랭한 기운은 내 기억 속 4월과 달랐다. 그런데도 나무엔 푸릇한 새순이 돋아나고 있었다. 아직 채 녹지 않은 눈에 다시 새 눈이 덮여서 녹아내린 진창의 기억을 망각으로 보내고 있는데도 나무는 겨우내 묵묵히 버텨온 가지를 털어내며 꿈틀대고 있었다.

 

그리고 알래스카의 4월은 불현듯 해가 길어졌고, 저녁 아홉 시가 지나도 창 밖은 환한 채 노을빛 하늘이 일렁인다. 여전히 찬 기운이 볼을 스치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봄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중얼거리지만 그들 역시 여름을 꿈꾸며 이 잔인한 4월을 견디고 있으리라.


누군가 말해주었다. 알래스카 주민들은 여름엔 여행을 하지 않는다고. 여행은 겨울용이지, 여름엔 얼마나 바쁜지 모른다고 했다. 정말 그들은 바쁘다. 하루 종일 내리쬐는 햇살 아래서 텃밭을 가꾸는 건 기본, 이맘때면 자작나무 수액을 채취하고 시즌마다 사냥을 가고 야생열매를 따고 연어를 비롯한 바다 낚시에, 해안가에서 미역과 톳도 건져 올린다. 산천에 먹거리와 모험이 즐비한 이 땅에서 자발적 원주민이 되어 살아가기를 자청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위해 도로가 만들어지고 상점엔 각종 도구와 백팩이 즐비하다.


이 4월이 가면 그들이 바빠질 시기가 온다. 툰드라의 들판과 산을 헤매고 다닐 관광객들과 사냥꾼, 야생 채집자들이 시끄러운 고함과 즐거운 웃음을 터뜨리기 전에 남은 4월이 천천히 가기를. 이 겨울과 여름 사이의 시절에 멈추어서 4월이 불러오는 그 온갖 '기억과 욕망'을 헤아려볼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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