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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베르 Apr 25. 2021

원고지, 미안해

약간의 일탈 행위

어느 순간부터 인위적이지 않은 감각들에 집중하고 싶어서 노트와 펜 대신에 원고지와 샤프를 쓰기 시작했다.


원고지는 칸에 맞추어 글을 쓰는 공간이어야 하지만 나는 약간의 일탈 행위를 하는 중이다.


책상에는 원고지 두 권이 있다. 한 권의 원고지에는 암기해야 할 수업 내용을 정리한다. 반으로 접어서 사용하면 가로로 쭉 펼쳤을 때 4개의 단이 한꺼번에 보여서 외우기 좋다. 다른 한 권의 원고지에는 아이디어를 정리한다. 요즘은 연구에 쓰는 시간이 많아서 논문들을 정리하고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면 그 옆에 적어내려가는 일을 매일 두 시간씩 반복하고 있다. 언젠가는 방황하는 아이디어들을 하나로 모아 제대로 된 결과물을 도출할 수 있겠지.


이러한 일탈은 원고지의 본질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200칸의 네모도 갈 길을 잃은 채 방황한다. 네모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 페이지를 글자와 그림으로 가득 채우는 못된 사람 때문이다.


원고지에는 샤프가 어울린다. 볼펜보다는 샤프를 사용할 때 집중이 잘 되고 생각이 효율적으로 정리된다. 왜 그런지는 조금 더 고민해봐야겠다.


며칠 전에 원고지와 샤프를 챙겨 가평에 다녀왔다. 청평호가 보이는 카페를 찾아 원고지를 펼쳤다. 호수가 보이는 창가에 앉으면 생각들이 정리되지 않을까 내심 기대해봤지만 결국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한 채 돌아와야만 했다.


원고지에게 미안하다.


-2021년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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