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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베르 May 31. 2021

열한 살 초여름의 속초

울산바위, 마지막 기억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속초의 모습은 초등학교 4학년 때의 그것이었습니다. 10년이 훌쩍 넘은 일이라 기억을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때가 늦봄에서 초여름으로 넘어가는 그 언저리였다는 건 분명합니다. 반 친구들과 함께 떠난 강원권 역사 체험 학습이었죠. 대관령 양떼 목장과 강릉 오죽헌을 들렀다가 속초에서 하룻밤을 보냈는데, 방에서 옆 친구가 코를 드르렁드르렁 고는 바람에 새벽 다섯 시에 잠에서 깼지요. 코를 골던 친구도 나의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고요. 그래서 우리는, 다른 친구들이 깨지 않도록 둘이서만 살금살금 베란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러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지요. 그곳에서 우리를 반겨준 존재는 새벽 어스름 사이로 희미하게 얼굴을 드러낸 설악산 울산바위였습니다.


'어...'


속초의 새벽하늘을 뒤덮은 안개 사이로 병풍처럼 펼쳐진 울산바위는 열한 살 소년에게 참으로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살면서 처음으로 '경외감'이라는 감정을 느낀 나머지, 날이 밝아올 때까지 말없이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어둠과 밝음을 반반 머금고 있는 하늘과 그 아래 세상을 압도하는 듯한 설악산의 병풍, 그리고 점점 걷히는 안개 사이로 그 장엄함을 드러내던 그때, 그 아침의, 신선한 충격.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지 않던 시절이라 아버지가 빌려주신 작은 카메라로 그 모습을 기록했습니다 (지금은 그 사진의 행방이 묘연합니다만).


다른 친구들이 깬 후의 아침은 지극히 평범한 듯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친구들 역시 베란다에서 울산바위를 바라보며 멋지다는 감탄사를 내뱉었죠. 그러고는 아침식사 시간 전까지 새로 나온 댄스곡에 맞춰 여섯 명이 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울산바위가 모습을 드러낸 그 베란다에서. 댄스에 전혀 소질이 없었던 나는, 춤을 추는 대신 친구의 휴대폰으로 댄스 영상을 촬영했지요. 울산바위를 배경으로 하는 그 영상은 그 당시의 우리에게 한 편의 뮤직비디오나 다름없었습니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속초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나에게 과거의 어느 공간은,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은 듯한 한 폭의 이미지에 나의 이야기가 투영된 방식으로 기억되곤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지금까지도 '속초'라는 단어를 들을 때면 이날의 기억이 아련히 떠오르는 까닭이.


많은 사람들에게 속초는 바다 또는 설악산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로 기억되곤 하죠 (바다와 설악산이 속초의 전부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적어도 인스타그램에서 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는 대체로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나에게 속초와 바다의 이미지는 결코 하나의 액자 위에 겹쳐지지 않았습니다. 내 기억 속에서 속초는 열한 살의 설악산, 숙소에서 바라본 울산바위가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나는 속초 바다 사진을 보면 알 수 없는 이질감을 느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때로는 잠들기 전에 '날이 밝으면 속초로 떠나야겠다'는 막연한 계획을 세워보기도 합니다. 속초의 바다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속초라는 공간에 또 한 편의 그림을 겹쳐놓고 싶기 때문이지요. 찬란한, 또는 고독한, 초여름의 물결, 그리고 그 앞에서 사색에 잠긴 청년. 그러나 막상 아침이 찾아오면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아직까지도 속초에 가 보지 못했습니다.


얼마 전에 프랑스 작가 엘리자 수아 뒤사팽(Elisa Shua Dusapin)의 소설 "속초에서의 겨울(Hiver à Sockho)"을 읽어보았습니다. 혼혈의 젊은 여인과 노르망디에서 온 만화가에게, 정적이 지배하는 한겨울의 속초는 어떠한 존재였을까요. 나는 이 소설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정체성에 관한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기에는 사유의 폭이 너무나도 좁은 탓일까요. 겨울에 속초를 찾아 깊은 사색에 잠겨본다면 좀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요. 서점 한구석에는 프랑스어로 된 원서가 꽂혀 있었지만, 나는 끝내 그 책을 열어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열한 살 초여름의 속초가 나에게는 속초의 전부가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문득 그날의 기억이, 세상 물정 모르던 먼 옛날 나의 모습이 그리워지는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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