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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SOME NIGHTS

아잔타 석굴에 이르는 길

안녕, 인디아

by 알버트




번쩍! 정신이 들었다. 습관적으로 손을 움직여 가방을 더듬는다.


...... 없다. 내 가방이 없다. 여권과 돈 내 카메라 등 가장 중요한 소지품들을 넣어서 휴대하고 다니던 가방,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보관에 주의하라고 여러 번 들었던 경고.. 잠을 자다 일어났을 뿐인데, 진짜로 내 가방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일어나 앉아 여기저기 찾아본다. 그래도 내 가방이 보이지 않는다. 분명 안고 잤는데, 자다 보니 내가 뒤돌아 자고 있다. 그렇다면 내 등 뒤에 놓여있어야 하는데, 그게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없다.

순간 멍하다. 와~ 이게 진짜로 일어나는 일이로구나.


너무 엄청난 일 앞에선 오히려 차가워지는 걸까. 나로서는 엄청난 일 앞에서 생각만 해본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무슨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인가? 돌아갈 날이 며칠 남지 않았는데, 며칠 만에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시간이 될까......


시간을 보니 새벽 두 시다. 깜깜한 어둠 속에 일어나 혼자 앉아 황당하고도 엄청난 현실 앞에 넋을 놓고 앉았다. 누군가가 이 사실을 안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방법이 없다. 지금 아는 것과 내일 날이 밝을 때 아는 것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사람들이 모두 다 잠들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무엇을 어찌할 수 있을까? 잠이 들면 중요한 가방을 놓치기 쉬운데, 너무 어이없는 자세로 잤던 것도 같다. 이 모든 것이 내 불찰이라는 생각에 차가운 한심함이 나를 누른다. 다시 눕는다. 어둠 속에 누워, 한심한 나를 책망하고 대책 없는 이 상황에 무언가 계획이라도 세워보자 했다. 그러나 눕는 그 순간까지 내게 일어난 이 일이 믿기지 않는다.


정말인가 싶어 뒤적뒤적 온 데를 다 만져본다. 그 순간, 흰 시트 아래에서 뭔가 만져졌다. 딱딱하다, 마치 내 카메라의 느낌이 든다. 전광석화와도 같이 일어나 앉아 시트를 뒤져보니 그 안에 내 가방이 자태도 우아하게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내 가방이 있다. 없어진 게 아니다.


몇 분 안에 지옥과 천국을 오고 간 느낌이다. 살아오면서 내 지갑이 없어졌던 많은 순간들에 느꼈던 감정이 있다. 믿을 수 없는, 거짓말 같은 현실이 진짜 내게 일어난 현실인 그런 상황, 처음으로 그 순간들을 부정할 수 있게 된 기억이 인도의 기차 안, 새벽 두시에 저장되었다. 내 피부가 닿지 않게 하려고 벽으로 걸어두었던 면시트가 내려앉으면서 내 가방을 덮었던 모양이었다. 그걸 알 리 없는 나는 일어나 앉아 주섬주섬 찾기 시작했고.... 남들에게는 한낱 에피소드에 불과할 이 일에 대한 경험이 어찌나 끔찍했던지, 단지 몇 분의 시간을 두고 내가 처했던 그 상황에 따라 얼마만큼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사람인지, 생생한 체험을 했다고나 할까? 다시 겪고 싶지 않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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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아오는 기차 안은 국가나 인종을 떠나 사람이라면 거의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기에 충분한 광경이다. 일어나 차례대로 이 닦고 세수하고 때로 화장실에 다녀오고, 아침 인사를 건네며, 그들은 짜이 나는 커피..... 이렇게 하루를 시작한다. 인도의 전통음료인 짜이는 마시려면 얼마든지 마실 수 있겠지만, 워낙 단 맛을 먹지 못하는 입맛 탓에 짜이의 맛을 극복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참 좋아한다. 아침 식사도 점심 식사도 건너뛰었고 과일로만 배를 채웠다. 여러 냄새가 뒤섞인 기차 안에서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다. 대신 사람들과 어지간히 익숙해졌다.


현지인들과 눈인사를 건네고 통성명을 하고,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자신들의 직업은 무엇인지, 그리고 또 어디로 가는지 주고받는다. 옆에 앉은 말없고 웃음 없는 무표정의 시크 아저씨는 알고 보니 무슨 발전소의 기술자였고, 건너편 2층의 총각은 대학을 막 졸업한 기술자인 듯하다. 차 안에서도 열심히 책을 보고 공부를 한다. 유심히 내 옆 참한 처자를 관찰하시던 아저씨는 가만히 보니 사교적이고 적극적이다. 내가 내리고 나서도 기차를 타고 하루 이상을 더 가야 한단다. 그는 그의 아내가 만들어 준 음식을 시시때때로 꺼내어 식사를 해가면서 그렇게 가시는 듯했다. 급기야 이 쪽으로 음식을 가져와서 억지로라고, 그의 사랑스러운 아내가 만들어 준 음식을 맛보게 한다. 어지간히 친해졌다고 그러는 것인지... 먹기 힘든 맛이 나서 호텔에서도 오이와 과일 커피로만 연명하는 내게 인도 도시락을 가지각색 들이대며 , 그것도 기차 칸에서, 또 그것도 자신이 드시던 음식을 맛보라니.... 미칠 것만 같다. 정중히 웃으며 사양해도 먹히지를 않는다. 여러 번 사양해도 더 여러 번 권한다. 능글한 아저씨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서 억지로 한 개를 맛보았다. 무슨 맛인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외국인에게도 자신 있게 내놓을 만큼 그 아저씨는 자신 있는 맛 이리라. 예의상 맛이 있다며 좋아하며 칭찬해주었다. 그랬더니 더 먹으란다. 우와~정말....... 사람은 정직해야 한다. 종류별로 맛을 보고 정중하게 사양했다. 그리고 과일을 먹으며 그 맛을 잊으려 했다.


내가 만약 저 음식을 어릴 적부터 먹어왔다면 저 음식은 아마도 내게 진수성찬일 것이다. 이 기차 안에서 김치와 된장찌개를 펼쳐놓으면, 억지로 그들에게 권유한다면 그들의 입에는 맛이 있을까? 아마도 기겁을 하겠지?

사람이란 본연의 모습은 너무나 비슷하겠지만, 각자 뿌리내린 지역과 문화적 차이에 의해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면 한편 당연하다 여기면서도 한편 쓸쓸한 것이 인간 사는 모습 같고, 평생을 구획 지어지고 범주화된 환경 속에 던져져 이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주어진대로 살아가는 것 같다.


여행은 나를 보고 남을 보고 우리를 함께 생각할 시간을 준다. 어쩌면 진정한 의미의 선물 이리라. 시간은 기차 안에도 흘러들어 새벽과 아침을 맞게 하고 또 사람을 이어주는 마당도 펼쳐놓는다. 서로 간의 식사가 끝난 후의 기차 안은 소란스러운 일상의 장이 된다. 짜이를 파는 장사꾼, 도시락을 파는 장사꾼, 음료수를 파는 장사꾼 그리고 가족과 여행 중인 현지인과 곳곳에 자리를 튼 여행하는 사람들. 사람들은 좁은 기차 안을 공유하게 된 시간을 버리지 않고 살뜰히 인연을 맺어갔다.


같은 기차여행이지만 인도가 아닌 유레일 침대 기차에서 나는 이런 경험을 한 적은 없다. 사람들은 제 짐을 지고 제 각기 정해진 칸을 차지하고 앉았으며, 제 목적지를 향해 갈 뿐 많은 이야기를 서로 나누지는 않았다. 나를 제외한 여행자들은 서로들을 알아가며 유대를 쌓아갔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정해진 시간에 기차에 올라 목적지를 향해 갔던 기억, 잊을만하면 나를 찾아왔던 검표원이 그나마 아는 체하던 사람으로 기억된다. 물론 프라하에 이르던 기차에서 서로의 언어로 소통했던 할머니와 꼬마이 이를 제외하고는, 가차가 가져다준 뚜렷한 기억이 없다.


나는 기차 안을 오가다가 한 소년과 그 소년의 어머니를 만났다. 그 소년은 잘 교육받은 아이의 면모를 풍긴다. 어머니 역시 매우 따뜻하고 소년 역시 따스하고 순수하다. 여러 장 사진을 찍었고 메일로 보내주겠다 약속을 했다. 소년은 태권도 2품인가 3품의 소지자였고 그는 내게 그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익숙한 도복을 입고 있는 그 소년의 모습이 멋지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물론 집에 돌아와 아무리 보내려 해도, 끝없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메일은 전송되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을 어찌할 줄 몰랐지만, 기억만큼은 여전히 따스하다.


인도 여행에서 기차 속에서의 시간만큼 인도인과 밀접하게 시간을 보낸 적이 없다. 한 공간에서 잠자고 먹고 시간을 보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사람들은 좋았다. 한국과 비슷했다. 교양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배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외향적 성격의 사람과 내향형의 사람들.... 친절하거나 혹은 무심하거나.... 그러나 내가 탔던 기차는 에어컨이 나오는 비교적 좋은 기차 칸이어서 이 칸에 탄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수준은 되는 사람들이라 한다. 인도에서의 문화는 카스트제도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한다. 우리에게는 천하에 몹쓸 신분제도인 카스트제도이고 반드시 타파되어야 할 나쁜 제도이지만, 그들은 그 속에서 태어나 그 속에서 살다가 그 속에서 죽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들에게는 그 제도가 그저 그들이 마시고 사는 공기쯤 된다고 했다. 분명 제도적으로는 없어졌다 하는 것이지만 국민 스스로가 그 바탕과 문화 위에서 살다가는 것이라 한다. 또 인도 인구의 약 80 퍼센트에 이르는 힌두교와 카스트는 묘하게 어우러져, 그들이 믿는 종교는 카스트를 반감 없이 숙명처럼 여기게 만들고 그리 살게 한다 하니, 사람의 믿음이란 것이 실로 위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혼도 결국은 같은 계급끼리 하고, 이는 교육받은 젊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의 생각이라 하니, 언제쯤 어떤 일로 촉발되어 이들에게서 변화가 가능할 수 있을까? 전생과 현생과 내세가 모두 한 데 어우러져 있어, 이생에서의 계급과 곤궁함 조 차도 당연시되고,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삶의 순환 고리로만 인식된다 하니, 적어도 이생에서의 불만과 반감 불행감이 적은 것인가? 그리하여 그들의 삶에서 가난하지만 불행이나 궁핍함의 절규는 보류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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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가 되어 전쟁을 치르듯 역을 내렸다. 기차가 두 시간을 연착하는 바람에 아잔타 석굴을 보기 위한 시간이 너무나 촉박했다. 두 시간을 버스로 달려 입구에 도착하자 있는 힘을 다 해 무조건 뛰어야 했다.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면 여기 온 보람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질주를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 새침했던 아줌마....... 전혀 뜀박질과 상관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뛰어야 한다는 말 한마디에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달렸다. 마구 뛰어가니 길가의 상인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서둘러~~ 뛰어~~~, 문 닫을 시간이야!! " 아, 물론 영어로. 이번 경우처럼 기차 연착해서 이 시간에 오는 한국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고 이런 일이 다반사였던 지...


다행히 아잔타 석굴 입장을 마지막으로 할 수 있었지만 관람을 마치고 내려가는 사람들을 보자 마음이 급해졌다. 사방은 조금씩 어둑해지고 있었다. 산 밑 석굴을 돌아보는데 점점 어두워지지 분위기가 묘했다. 내가 만약 그 분야에 대해 박식하거나 관련 있는 사람이었다면 분명 감격스러웠을 곳이었겠지만 나에겐 다만 너무 대단한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세계사 책 속에서나 보았던 장소였고 들었던 장소에 왔다는 그런 생각, 너무 뛰어서 가슴이 아프고 다리가 후덜거린다는 생각, 또 기관지가 좋지 않은 저질체력 탓에 구역질이 나서 괴롭다는 생각, 그런 생각들이 났다.


아잔타 석굴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며, 설명의 의하면 엘로라 석굴의 기원이기도 하며, 기원전 2세기부터 7세기까지 약 9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만들어진 조각 예술과 벽화예술의 보고라고 한다. 특히 엘로라 석굴과는 달리 29개 모두의 석굴이 불교 석굴이다. 8세기 이후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면서 무려 1,100여 년이나 밀림 속에 숨겨져 있던 것이 1819년 호랑이 사냥을 나왔던 동인도 회사 소속의 영국군 병사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한다. 발견 당시에는 오랜 세월 동안 두텁게 쌓인 먼지층으로 인해 벽화의 색채가 그대로 간직되어 있었지만 현재는 색이 많이 바래어 향후 50년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하니, 그래서 입장시간에 대한 강력한 규칙이 생긴 것인가 싶기도 하다. 연꽃을 들고 있는 보살상이나 흑인 공주 등 최고의 벽화뿐 아니라 조각을 감상할 수 있는 1번 굴, 부다의 탄생 벽화가 훌륭한 2번 굴, 큰 규모의 부다의 태자 시절 벽화가 뛰어난 4번 굴, 2층 구조의 6번 굴, 보존 상태가 가장 좋은 17번 굴, 인도에서 가장 큰 열반상이 있는 26번 굴이 볼만하다고 한다. 우리가 봤던 것도 1,2,4... 이런 순이었던 것 같다.


어둑해지는 석굴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길이 꽤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떠나면 그들은 그대로 어둠 속에 잠들 터였다. 많은 수의 현지 관광객들과 수학여행 온 학생들과 함께 걸어내려 오던 길이 기억에 남는다. 피곤했다. 작은 셔틀버스를 타고 오는 길에, 휙휙 거리며 휘파람을 불어 대는 인도 청소년들의 거들먹거림에도, 자리에 앉은 외국인들의 반응에도, 그리고 버스 안을 가득 메운 모기들의 왱왱거림에도 반응할만한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호텔로 가는 길, 버스에 실려가며 인도 여행 중 처음으로 한두 시간을 잤다.


이제 내일모레면 집으로 갈 날이다. 인도 여행에서의 마지막 밤, 아련하고도 기억에 남았고 좋았던 기억들을 그렇게 잠 재워야 할 시간이었다. 내일 밤은 공항에서 있게 될 터였다. 그리곤 한국이다. 집이 있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