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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SOME NIGHTS

카트만두 산책

안녕, 네팔

by 알버트



* 이 여행기는 2015년 네팔 지진이 일어나기 이 전에 여행한 기록입니다. 사진 역시 지진 이 전의 모습입니다.



떠날 때가 되었을 땐 지쳐있었다. 몰아치는 일 속에 파묻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지내고 약간의 미안함을 슬그머니 내린 채 주섬주섬 짐을 꾸렸다. 이른 새벽, 공항에 도착해 일행을 만나고 나서야 어디론가 떠난다는 게 실감이 났다. 멀리 있어도 어제 본 것처럼 편안한 제 각각의 사람들, 함께해서 좋다.

약 8시간 후에 네팔 카트만두 공항에 내렸다. 떠나기 전 기대를 잔뜩 했다. 네팔 하면 떠오르는 청량한 산과 트래킹 코스, 그런 산등성이를 걸어 올라갈 것을 생각했다. 오~ 드디어 나도 멋진 여행자의 대열에 합류해보는구나 상상했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얼마나 우스운 일이지 모른다. 엄연히 여행 코스가 달랐는데, 떠날 때는 내가 어느 도시 어떤 곳에 머무를지조차도 확인되지 않은 채 몸만 얹었던 것이 이유라면 이유였다. 그러니 상상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처지였다.


사실 연말 마무리가 너무 바빠 여행지에 관한 정보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급히 떠난 터라 찜찜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인도에 관한 진중하고 묵직한 내용의 책도 빌려다 놓고는 읽지도 못하고 떠났다. 이 또한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건대, 가장 후회하는 일 중의 하나는 책을 가져갔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긴 시간을 육로로 이동하는 것을 염두에 뒀다면 책을 들고 갔어야 한다는 것. 사실 그런 것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음악 파일을 담아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기, 무겁긴 하겠지만 읽을 책, 또 인도 여행의 경험이 많은 분이 일러주었던 마스크(견디다 못해 인도의 한 약국에서 구입하긴 했지만, 좋은 면의 두툼한 한국 마스크가 좋을 것 같았고, 또 인도뿐 아니라 산업화의 한가운데 있는 것 같은 네팔 카트만두 시내에서도)가 필요했다. 그리고 2주 정도의 여행이라면 밑반찬 두어 개 정도는 가져갔어도 좋았다. 물론 그 덕에 몸무게가 줄어든 효과는 있지만 긴 이동시간에 지쳐가고 침대 기차를 타고 움직인 18시간 중에는 컵라면 한 개만 있어도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 또한 가방에 넣었다가 빼놓고 온 품목이었다.

지금 만약 다시 인도를 가기 위해 짐을 꾸린다면, 나는 책, 음악파일, 마스크, 약간의 저장식품류의 밑반찬 한 두개, 튜브 고추장, 뚜껑을 따고 포개 담은 컵라면 서너 개, 비상 상비약, 길에서 만난 인도 아이들과 마음껏 친해지고 즐겁게 이야길 할 수 있게 해주는 가벼운 문구류 몇 종류와 캔디 초콜릿 부피 작은 과자 종류....... 또 머플러, 카디건도 계절용, 또 다양한 상황에서 이용 가능한 폴라폴리스 소재의 잠바 종류, 멀티 어댑터, 여행 정보를 담은 관광 관련 책자 등을 준비할 것이다. 그리고 카메라 선글라스 모자 등은 기본 준비물에 해당된다.

카트만두 공항, 조금 의아한 모습이 펼쳐진다. 공항이 이렇게 소박할 수도 있구나, 이렇게 시골스러워도 하긴 비행기는 내리 수 있지? 싶기도 하다. 오랜 기다림 끝 비자를 발급받아 나왔다.



공항에 내린 게 맞는가? 하는 생각이 살짝궁 들게 했던 카트만두 공항, 굉장히 서민적이지만 아늑하기도 하고 조용하기도 하다. 걸어서 3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를 셔틀버스가 태워서 입구에 내려다 주었다. 20초도 안 걸린 것처럼 느껴졌는데, 난 그것도 모르고 일행과 떨어져서 바짝 긴장했다. 그러니까, 한 20초쯤 작정하고 긴장한 것이었다. 싱거운 긴장이었다.



입국심사를 하기 위해 긴 줄을 만들어 서 기다린다. 제복을 입고 근무하는 우리나라나 중국 등의 공항 직원들과 달리 이들은 사복을 입고 있다. 신선했다. 뭐, 찔릴만한 것도 없는데, 괜히 나만 입국이 거절되면 어쩌나 하는 짧은 걱정이 지나칠 때쯤 도장을 몇 군데 꽝 꽝 꽝 하고 찍어주었다.


멀리서 보이긴 질서 정연하게 보이지만 저건 어쩌다 보니 나온 것이고, 공항 문밖에는 빠져나오는 승객들을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앉아있는 대합실이 정면에 있어서 우선 나오다가 깜짝 놀라게 된다.



쿠마리 사원과 다르바르 광장을 향해 올라가는 길, 수많은 인파와 오토바이에 휩쓸리며, 가득한 매연에 스카프로 입을 친친 동여매고 걸어갔던 길이다. 다리 양쪽으로 판을 벌여놓고 각종 야채와 과일을 파는 사람들이 신기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한다.





버스를 타고 스와얌부나트 사원으로 올라가는 길은 좁고 굉장히 복잡하다. 어떻게 저 길을 올라갈 수나 있을까란 생각을 하고 또 하다 보면 버스가 목적지에 다다른다. 사람들이 다치지 않을까 내심 걱정도 되었지만, 다행히도 자동차와 오토바이 그리고 사람들은 요령 좋게 피해가며 서로의 길을 간다. 그 속에 그들의 삶이 녹아있다. 참 잊기 힘든 광경이다. 창밖을 지나가며 본 이발소도 지극히 정겹다.



스와얌부나트 사원에 오르며 가장 먼저 눈에 띈 장면이다. 고소공포증이 매우 심각한 나로서는 기절초풍할 일이었지만, 저 위에 앉을 수 있는 사람들은 또 다른 세상을 보는구나 싶은 마음이 든다. 어찌 되었든 저들도 우리처럼 친구끼리 도란도란 무슨 이야기인지 주고받을 것이다. 저들의 세상, 우리들의 세상. 한 공간 다른 생각. 그러나 결국은 같은 삶.



원숭이 사원 아니랄까 봐 진짜로 원숭이가 있다. 석양을 즐기는 그들, 뭔가 아는 것 같다. 정말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



노을이 지는 저 건너편을 바라보는 연인, 늘어진 개들...... 묘한 어울림.





각자의 소원과 기원을 염원하며 손을 뻗어 스치며 걷는다. 저들이 소원이 얼마나 이루어졌을까 궁금해진다. 그리고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을 그들의 소원이 궁금하다. 지진으로 이 사원도 허물어진 모습을 뉴스에서 보았다. 현재는 어떤지 모르겠다.






쿠마리 사원과 다르바르 광장에 어둠이 짙어질 때 찾아들었다. 달을 보며 걷는 길은 익숙지 않은 공간과 더해져 제법 으스스한 기운을 느끼게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익숙지 않은 것에 어둠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가는 곳마다 해가 지면 너무 어둡다. 이 광장 역시 굉장한 피해를 입었더라. 슬프다.




음~ 정말 매우 먹기 힘들었던 네팔 전통 음식이었다. 그래도 최선을 다 해 먹었다. 컴컴함이 더해져 조금 힘든 첫날 저녁이었다.




카트만두 시내는 우리가 지나왔던 시대, 환경이니 오염이니 여 유니..... 하는 그런 것들을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우리나라 근대화 초기의 모습처럼 보였다. 시내는 온통 매캐한 매연에 수없이 많은 자동차와 오토바이들이 매연을 내뿜었다. 그들은 좁은 골목길을 곡예하듯 서로 비껴 다녔다. 그리고 자동차와 오토바이 안팎으로 박혀있는 사람들의 모습.

어두워진 깜깜한 밤 호텔로 가기 위한 버스 안에서 드는 생각은 참 여러 가지다. 충격적이기도 하고 약간의 걱정과 난감함이 교차되는 시간이다. 온통 어두침침하고 거무튀튀하고 지저분하고 난처하고 마음 불편하기도 한 심정이랄까. 가볍게 여행을 떠난 마음을 뒤흔들게 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떠나기 전 막연하게 상상했던 네팔 트래킹 코스를 떠올렸으니 말이다. 내가 가는 곳의 환경이 어떤지조차 모르고 떠난 여행이었으니, 첫날 느끼는 그런 마음이야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첫날은 당황스러웠다.

돌이켜보면 골목길을 곡예하듯 운전하며 서로 비껴 지나가는 수많은 차량들과 오토 바이에 앉아 우리를 쳐다보며 마주친 눈빛들이 선명하다. 어둠이 내리는 음침한 원숭이 사원의 풍경과 그 안에서 만난 사람들, 사원 주변에 진을 치고 장사 중인 상인들과 그 상품들...... 순간 지나쳐 갔지만 의식 속에 들어앉는 그런 복잡스러운 마음을 뭘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다소 꾀죄죄하고 내 보기엔 허접한 상품들을 진열하고 거두어들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게 저래서 팔릴까? 하는 걱정과 염려가 일었고, 알 수 없는 속상함과 뭔지 모를 마음이 밀려드는 것 같았다. 내가 저걸 해결할 수도 없으면서 어느새 나는 그 일을 해결해야만 하는 사람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세상엔 나와 무관하게 흘러가는 일이 많고, 더러는 그런 일은 내 소관이 아니라 신의 영역임을 믿어야 할 때가 있다. 그들이 하는 일은 그들에게 필요한 일이고, 그들에게는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가 중요했지만, 나는 먼저 그들의 끼니 혹은 행복 같은 것을 생각했다. 알고 보면 그들의 기준이 아니라 그것도 내 기준으로 말이다. 그들은, 내 보긴엔 저래 보여도 저런 장사를 오랫동안 해 올 수 있었을 만큼의 이익을 볼 것이고, 밥 굶지 않고 불행하지 않다 느끼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원을 했다. 그들이 얼마나 눈부신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면 나는 더는 내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을 내 식으로 재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꾸마리 사원에서 본 꾸마리는 또 어떤가? 과연 그 어떤 잣대로 그것을 잴 수 있을 것인가? 다섯 살 어린아이를 모시는 그들의 정신세계에 대해 내가 뭐라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의 생각과 문화, 풍습 그리고 하는 일을 그들만의 영역으로 존중하는 것이 이 여정의 시작부터 떠오른 질문에 대한 최종 답이었다. 어느 곳에서든 독특한 문화가 있으며, 이는 그들이 살아가는 고유한 방식이라는 것, 그러니 나는 그를 보면서 생각하고 돌아보면 되었다.

어두워지는 저녁, 거무튀튀한 사원, 어둑어둑한 집 안에 나타난 다섯 살 짙은 화장의 표정 없는 꾸마리와 온통 매연으로 가득 찬 도시, 골목 사이사이를 가득 매운 오토바이와 트럭 그리고 사람들로 구겨 넣어진 작은 버스들 속의 알 수 없는 표정들의 사람들.... 네팔 카트만두 시내를 접한 나의 첫날 첫인상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유일하게 나를 기쁘게 만드는 것은, 좁디좁은 스쿨버스 속에 앉아있던, 피어나는 꽃 같았던 어여뻤던 소녀들의 모습이었다. 하루 중 그 어떤 광경도 그렇게 예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도 어둠 속을 걸은 하루여서 그랬던 것 같다. 화사한 빛 속에서 보았으면, 원숭이 사원의 그 어둑어둑함도 퀴퀴함도 다소 신비롭게 여겨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던 것이다. 생소한 풍경, 짐작하지 못한 감정과 마주한 카트만두에서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지난번 지진이 발행했을 때 카트만두의 정경이 보이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내가 걸었던 그 길과 건물, 도로, 광장과 사원 등이 모두 무너지고 피해를 입었다. 그 속에서 살았을 수많은 이들이 속절없이 목숨을 잃었다. 말로 할 수 없는 슬픔이었다.


오랫동안 신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 폐허가 된 그 광경 속에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키워갈까. 지금까지 살아온 역사가 나와 다르니 그들은 분명 나와는 다른 생각을 엮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