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순간을 여행처럼
지금은 넉넉하고 웃음 좋은 한 친구 녀석이 있었다. 중학교 때 헤어지고 나서 어른이 되어 만난 녀석은 참 밝고 긍정적이고 사람 푸근하게 해주는 재주가 있다. 초등학교 4학년, 이 녀석이 내 뒷자리에 앉았다. 어느 날 녀석이 "얼레리 꼴레리~" 하면서 큰소리로 나를 놀렸다. 말인즉슨 내가 내 남자 짝꿍을 좋아한다는 말이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표현력 제로의 소심쟁이 나는, 빨간색 2단 자석 필통을 냅다 던지며 서럽고 크게 울었다. 우리 아버지께서 처음 일본 연수 가셔서 사다주신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그 필통은 그때 나의 자부심이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한 반에서 공부했을 정도로 우린 시골에서 자랐다. 그러다 보니 해마다 내 옆에 앉게 되는 짝이 같을 때가 많았다. 내 짝으로부터 한 번은 벗어나고 싶었으나 이상하게도 번번이 실패했던 내 남자 짝꿍, 그리고 사실 이 아이가 오래 날 좋아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으나 어쨌든, 내가 이 짝꿍을 좋아한다는 억울한 말을 들었으니, 설움은 폭발하고도 남았다. 나를 놀린 녀석은 깜짝 놀랐던 모양이다. 녀석은 미안하다고 달랬지만 쉽게 해결될 울음은 아니었다. 사실 그토록 서럽게 운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말 한 번 못 붙여보고, 짝꿍 한 번 못해보고, 한 여자애의 짝꿍이 되어 내 앞에 앉던 반장 녀석, 그 반장 녀석이 정말 내가 내 짝꿍을 좋아한다고 믿을까 봐였다.
5학년, 2학기 임원선거가 끝났다. 그 당시 보편적으로 반장은 남학생 부반장은 여학생이었다. 내가 2학기 부반장이 되었다. 아이들이 나를 추천하더니 나를 뽑았다. 임명장을 받는 날 나는 선생님께 울면서 손바닥을 맞았고, 급기야 엄지손가락 마디를 빚 맞는 사고를 당했다. 나는 선거가 끝나고 임명장을 받는 날까지도 부반장을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웠던 모양이다. 선생님은 이유를 묻지 않고 내 고집에 대한 응징의 방법으로 내가 받아들일 때까지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손바닥을 때렸다. 결국 시커멓게 부어오른 손을 부여잡고 통곡하는 나를 데리고 가서 초록색 둥근 통에 담긴 안티푸라민을 처덕처덕 발랐고 다음날도 다음날도 상태를 확인했다. 사실 그 손가락 마디는 그때 이후 지금도 센 힘을 가하면 뒤로 젖혀지고, 누르면 아프다. 이런 아픔을 느낄 때마다 나는 그날이 생각난다. 아 그리고, 왜 고집을 피웠느냐고? 이상하게도 내가 좋아하던 그 반장 녀석은 항상 다른 여자애와 임원 짝꿍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녀석이 반장이 아닌 그때는 더 이상 부반장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5년이나 그래 왔고 사실 그 뒤로도 마찬가지였었다.
집 앞 개울 건너 감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다. 가을이 되어 붉은 감이 열릴 때쯤 그 녀석은 가끔 감나무에 와서 감을 따곤 했다. 그런 날이면 내 심장이 내는 소리로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나는 그 녀석이 왔다가 사라지는 것을 안 보는 척하면서 지켜보았다. 그 녀석이 있던 감나무는 황홀하게 아름다웠고 그 녀석이 없는 감나무는 쓸쓸했다. 감나무뿐만 아니라 그 녀석이 출몰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은 나에게도 의미가 있거나 없거나, 그러했던 시절이었다.
남녀공학 중학교엘 다녔다. 소나무 숲과 아름다운 교정으로 전국 아름다운 학교숲 1회 대회에서 일등 할 정도였던 학교였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웠고 가장 애틋함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사춘기가 시작되었던 모양이다. 초등학교를 지나 중학교까지 나는 늘 그 반장 녀석을 좋아했다. 아니 얼굴 한 번 마주친 적 없는 고등학교 3년도 그 녀석을 좋아했다. 중학교에서 집까지는 4킬로미터, 십리였다. 평발인 나는 친구들이 조잘거리며 집까지 걸어갈 때 항상 하루에 몇 번 있는 버스를 타고 다녔다. 그 녀석도 그랬다. 우리 동네에서 중학교에 진학한 친구는 나와 이 반장 녀석을 포함한 남학생 셋이었다.
가끔 마지막 밤차가 고장 나서 오지 않는 날이 있었다. 그런 밤, 그 녀석이 없으면 나는 울면서 집엘 갔다. 전등도 전화도 없는 깜깜한 밤, 혼자 십리 밤길을 걸어갈 생각을 하니 앞이 깜깜하고 무서워서 그랬다. 집에 가는 길엔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만한 집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상엿집, 상엿집 건너 산은 공동묘지 그리고 우리 아랫마을은 성황당을 지나야 했고 우리 동네 초입에도 성황당은 있었다. 아이들은 가끔 저 멀리 공동묘지에서 혼불이 반짝인다는 말들도 흘리고 다녔으니, 혼자 가게 되는 밤은 내내 울며 달리다시피 해야 했다. 그리곤 나를 두고 친구들과 걸어 가버린 반장 그 녀석을 향한 원망의 마음도 없지 않았다. 어쨌든 집에 걸어가야 하는 밤, 그러나 그 녀석과 가끔 함께 가게 되는 날은 걱정이 없었다. 그 녀석이 앞장서 걸으면 난 10미터쯤 떨어져 걸었다. 물론 동네에 당도할 때까지 정확히 거리는 지켜졌으며, 나나 그 녀석이나 서로 말 한마디 나누는 법이 없었다. 나는 너무 내성적이었고 그 녀석도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대학교 다닐 때였다. 그 녀석과 나는 같은 도시에서 대학을 다녔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모퉁이를 돌자 갑자기 내 눈앞에 그 녀석이 나타났다. 그 길로 뒤돌아서 뛰어 달아났다. 녀석을 본 지가 이미 5년이 넘었다. 고등학교 내내 한 번도 마주친 적도 없었다. 달리다 멈추고 나서도 그 녀석이 눈물 나게 그리웠다. 멋진 그 녀석의 음성을 닮은 저음의 남자 목소리를 나는 여전히 좋아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 녀석은 자주 내 꿈에 나타났다. 말할 수 없이 자주 나타났다. 내 꿈속의 단골손님이었다. 십수 년 전 초등학교 동창회를 한다고 연락이 왔었다.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포항엘 갔다. 그 이후 한 번도 간 적이 없지만 혹시라도 그 녀석을 한 번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컸다. 아쉽게도 그 녀석은 내 기대를 저버렸다. 돌아오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용기를 내어 친구한테 얻은 번호로 난생처음 전화를 걸었다.
그 녀석과 통화를 하고, "너를 제외하고는 내 유년이 기억나는 것이 없다"라고 웃으며 고백한 후론 나는 더 이상 그 녀석의 꿈을 꾸지 않았다. 왜 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토록 빈번하게 내 꿈속에 나타나던 그 녀석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내 유년 역시 너를 제외하고는 기억나는 게 없다"는 그 녀석의 말에 안심이 되어 더 이상 내 꿈을 어지럽히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허전하고 조금 슬펐고 그러나 이상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십수 년 전의 일이다.
지난밤, 그 녀석과 말을 나누었다. 그 녀석의 딸에게 주기 위해 예쁘고 귀한 무언가를 많이 사 가지고 갔던 모양이었다. 헤어지기 전, 그 녀석이 내가 가지고 간 가지가지 꾸러미들을 하나하나 보면서 웃어 보였다. 너무 좋다고 말했다. 진심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도 기뻤고 그 녀석을 보는 내 마음이 행복했다. 그 녀석을 꿈에서라도 보게 되어 좋다고 생각했다.
나는 오랜만에 그 녀석의 꿈을 꾸었고, 그 간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리란 걸 알았다. 몇 달 동안 시달려왔던 의욕상실이 사라졌고 예전 같은 열정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그 녀석은 이런 식으로 꿈에 등장했다. 내가 깊은 슬픔에 잠기거나 심연에서 허덕일 때, 길을 잃고 방황하거나 말할 수 없이 작아져 있을 때, 그 끝 어느 날 그 녀석은 나타났고 나는 오랜 어둠에서 길어 올려졌다. 그 녀석에 대한 나의 빛나는 기억은 여전히 효력을 발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