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러시아
"따닥~!" 하는 소리가 길게 들리면서 주머니가 훌렁거렸고 곧이어 가벼워졌다. 휴대폰이 대리석 바닥에 패대기 쳐지면서 낸 소리였다. 보딩 하기 전 마지막으로 들른 화장실에서 달려 나가다가 오른쪽 상의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떨어졌다. 아뿔싸~하는 절망감을 숨기면서 주웠다. 화면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경황이 없어 우선은 배낭을 지고 비행기에 올랐다. 내내 불길했던 마음이 예견하던 것이 이 것이었던가 싶자, 죗값을 치른 사람처럼 비로소 안심되기 시작했다. 선반에 짐을 올린 뒤 좌석에 앉아 정신을 차려보니 액정이 완전히 망가졌다. 화면에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포기하고 배터리를 분리해 가방에 넣었다.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여행팀을 이끈 대장이 급하게 휴대폰이 망가졌다는 사실을 가족에게 알렸고 나는 이내 무거운 마음을 접었다. 그런 사람 옆에 있다는 것이 적잖이 안심되었다. 먼저 요구하지 않아도 내 상황을 배려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나에게 아직 휴대폰이 없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을만한 시간은 지나지 않았다.
창밖으로 펼쳐진 자작나무 숲을 보면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며칠을 달려보는 것은 오랜 꿈이었다. 퇴직하면서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었기도 했다. 프로젝트도 논문도 그 어느 것에도 집중할 수 없는 시간이 닥쳐온 시기에 내가 선택한 것은 겨울 바이칼을 찾아가는 이 여행이었다. 오랜 꿈이었으니 그 꿈 하나를 건너면 딴 세상이 열리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시베리아를 가기 위해 며칠 전부터 사들인 방한용품이 한 짐이었다. 바이칼 원정대라 불렸던 우리 팀은 바이칼을 가기 위해 하바롭스크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일단 이르쿠츠크까지 가기로 되어있었다. 50시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열차를 탈 것이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마음을 일으키려 떠나는 데만 급급해 동행이 있다는 사실이 가져올 수 있는 일들을 깊이 생각지 않았다. 앞 뒤 양 옆 동행들 사이에 앉은 마음은 그들 사이에서 적당히 안심되면서도 결국 나 혼자라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그들이 가진 세상을 내가 가지지 않았고 내가 가진 것들을 그들이 볼 수 없었다. 그들이 말하지 않은 것들은 그들 안에서 춤추었고, 내가 발설하지 못한 마음들도 나를 넘어서지 않았다. 우린 같이 있었으나 나는 혼자 있었다. 그들은 함께 있는 듯 보였으나 진정 함께 있었는지는 알 수없다. 다만 나는 혼자가 아닌 여럿 속에 있으니 너무 나를 드러내어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쩌다 보니 함께하는 여행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나였고, 이미 나는 내 분신과도 같던 휴대폰을 잃은 후라서, 그들이 신경을 쓴다면 신경 쓰일 사람이었다. 좋아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제 각각의 이유로 길을 나선다. 먼저 말하지 않았고 알지 못했지만 누구라도 그러했을 것이었고, 그런 마음으로 나선 그 만이 자신의 세상에 정통하고 절박했을 것이다.
휴대폰이 내 삶에서 사라짐으로써 가장 그립고 아쉬웠던 일은 음악을 들을 수 없다는 것과 세상에서의 고립감이었다. 횡단 열차를 타고 이어폰을 꽂고 음악과 함께 긴 시간을 가는 것은 오랜 꿈이었다. 새벽부터 밤까지 내 눈앞에서 펼쳐질 세상을 보는 일은 경이로웠지만 음악과 함께라면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을 주었을 것이었다. 일상적인 장면에 음악을 입히는 일은 평소 좋아하는 일이었고, 여행 중이라면 더더욱 필요했다. 아쉬웠다. 그리고 음악이 듣고 싶었다.
외로움을 느끼는 것, 굳이 부재와 낯 선 사람들 속에 있다는 것이 이유는 아니다. 불쑥 찾아온 뒤엉킨 마음은 여행 중 자주 말없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도록 했고, 사람들과 풍경들을 관찰하도록 했다. 우리는 마주 앉아서도 눈 앞의 대상보다는 더 가까운 누구를 그리워하고 그들과 밀접해지고 싶어 한다. 다양한 매체는 이를 부추기고 우린 그런 세상에서 살아간다. 나 역시 시대에 맞게 이를 즐긴다. 우리는 사람들 속에 있지만 그 너머 누군가와 끊임없이 관계를 확장시키고 일상의 기쁨을 증폭시킨다. 내게 휴대폰이 있었다면 나 역시 그러했을 것이었으며 그런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울 일이었다.
우연히 나에게 이런 시간이 찾아왔고 스크린을 터치할 때마다 활짝 열어젖히던 먼 세상으로 당분간은 건너갈 수 없었다. 그러나 실은 가장 답답한 일은 수시로 들락거리며 확인하던 일정표와 시간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내가 알고 싶은 그 무엇이 있을 때마다, 내 의지가 아닌 그 누군가의 수고로움을 거쳐야 한다는 것, 아니 그런 별 것 아닌 요청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불편했다. 그냥 그 순간에 있을 수 있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이로써 내가 선호하는 내 방식이 여럿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소 불편해도 카메라를 이용해 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배터리 하나 교환하는 데 한 달이 걸린다던 내 시계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부재는 다른 상황으로 우리를 이끄는 경우가 많다. 나는 우리를 이끈 Quan이라는 대장에 얹혀사는 사람처럼, 간간이 그가 들려주는 내 가족의 소식을 접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그는 내 가족과 심심찮게 소통하고 있었다. 그는 나보다 내 식구에게 더 다정하고 적절한 유머를 보내는 듯했다. 식구들은 금세 알아챘지만 그들은 이유 있는 연결 속에 묶여 열흘을 지냈다. 왠지 그와 친밀감이 느껴졌다. 잘 알 수없었지만 열흘간의 여행이 지난 후 우리팀에게 묶여있는 사랑스러운 연대를 넘어서는 다른 것이 있는 듯했다.
인천공항을 출발해 하바롭스크 공항에 내리기 위해 비행기는 멀리 내려다보이는 아무르강을 선회하며 고도를 낮추었다. 내 앞에 흰 눈을 입은 세상이 펼쳐졌고, 우린 곧 시베리아 칼바람을 맞으며 얼얼해지기 시작했다. 비행기 연결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사람들의 머리카락은 사방으로 흩날렸고, 셔틀에 오른 사람들은 차가운 공기와 대면하자 용처럼 연기를 뿜었다. 해리포터가 입고 있던 투명망토가 벗겨지면 그런 모양이 드러날까.
낯 선 세상에 발을 디딘 걸음이 평소와 달리 긴장되지 않았다. 여럿이 함께 있다는 것이 강력한 위안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이미 불확실한 것들의 존재와 쓸모없는 휴대폰을 잊기 시작했고, 강추위에 적응하는 것이 눈 앞의 과제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바람이 매서웠다. 이제 겨우 비행기에서 내렸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