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러시아
하바롭스크에 당도해 우리가 입국장을 통과하는 시간은 더뎠다. 희뿌연 입김이 내 말을 따라 춤을 추던 셔틀에서 내리자마자 줄을 선다고 섰지만, 남은 이들은 결국 일행뿐이었다. 길든 짧든 외국에서 돌아왔을 때 짧은 안도감을 느끼는 때는 인천공항 무빙워크에서 밖을 바라볼 때인데, 아마도 남의 땅에서 겪는 소소한 차별과 불편한 조각들이 여행 말미에 작은 안락함을 선사하는지도 모르겠다. 쉬운 한국말, 넓고 깨끗한 화장실과 그 모든 것들이 마치 내 것인것 같은 마음, 그런 마음이라도 없다면 우린 그 먼 어딘가를 더 자주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 탈출했다.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그리고 사람들 뒤로 현지인 둘이 기다렸다. 우리를 이끈 이의 친구라 했다. 콴이라는 아는 사람의 친구....... 그들과 우린 버스를 타고 하바롭스크역으로 갔다. 짐 보관소에 짐을 두고 친구의 차를 타고 아무르강으로 향했다. 바람은 매서워 말을 잊게 할 정도였지만 우린 하늘에서 내려다보던 그 크고 넓은 아무르강 위를 걷고 있었다. 시간의 배열도 공간의 열림도 때론 계획을 숨기고 있는 것 같다. 하늘을 날고 있을 때 그 위에서 개썰매를 타는 사람들에 환호를 지르며 칼바람 부는 아무르강 위를 걷게 되리란 걸 알았을까? 입이 얼고 뒷머리가 아프고 뺨은 얼어서 붉은 빛을 냈다. 그래도 터지는 즐거움을 막을 방도는 없었다. 시베리아의 추위란 이런것임을 아는 것마저 유쾌했다. 그 때 두겹으로 쓴 모자는 시베리아 여행 내내 거의 벗지 못했고 두겹으로 쓴 장갑 또한 마찬가지였다. 손가락 하나를 꺼내 셔터를 누르기가 힘들 정도였다.
아무르 강
우체국을 들르고 휴대전화 유심칩을 산 뒤 저녁을 먹었다. 우리가 이른 곳은 아름다운 식당이었다. 내가 아는 이의 친구는, 그의 친구의 아는 이들에게 무엇이 좋을까 고심했을 것이다. 한국을 찾아온, 내가 아는 사람의 친구를 만났다면, 나 역시 그러했을 것도 같다. 우리 앞에 당도한 각종 음식들의 향연을 보면서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감탄과 비명은 즐거운 그것이었다. 그리고 기차역으로 가는 길에 얼음조각으로 한겨울을 난다는 레닌광장을 들렀다. 늦은 밤, 불빛과 얼음조각들로 한산한 그 공간이 우릴 반겼다. 사람들은 때에 따라 아이들이 된다. ' 까꿍~' 내지 '영구없다~' 같은 유치한 놀이들은 꾸밈없이 마주할 사람이 있을 때 가능한 놀이일지 모르겠다. 그날 밤 사람들이 거닐던 걸음은 그런 무늬를 자아냈다. 즐거웠던 순간, 그들과 우리들의 시간이 교차했던 시간이었다. 시간이 가면 추웠으나 이국적인 그 때를 잊어가겠지만, 언젠라도 그 순간을 추억하는 이의 마음엔 오래 깃들 것이다. 우리가 때로 책장 속에서 마른 잎 하나를 들추어 내듯, 우리들의 삶이 맥없이 늘어지고 빛을 바래갈 때에도 문득 문득 그 작은 순간이 존재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바롭스크 시내
여권과 표검사를 마치고 자리 하나씩을 배분 받았다. 아는 이의 친구들이 열차에 올라 우리 짐들을 챙겨주고, 사람들이 앉을 자리들을 모두 확인 한 뒤 안녕을 고했다. 진하게 포옹하고 감사한 마음을 담아 눈인사를 보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진심으로 고맙고도 아쉬운 순간이었다. 내 짐 하나를 기어코 들고 올라와 내 자리에 두고 갔다. 무언가 그들에게 기념할만한 것들을 해주고 싶었으나, 때론 적정한 거리를 지켜내는것이 나을 때도 있다. 그들은 내가 아는 이의 친구들로서 나의 감사보다는 그이의 감사가 중요했을 것이며, 그런 기회를 우리의 그에게 주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보았다. 우리가 아는 그였던 콴은 충분히 그러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친구의 친구들이 여행온 길을 마중하고 안내하며 작별까지 할 수 있겠는가.
잠깐 들은 이야기로는 콴이 유학 중에 만난 친구들이었다. 이들을 보며 사람들의 인연이 무얼까 생각했다. 그런 인연으로 내 곁에 남은 이들은 얼마나 있으며 그들 곁에 남은 나는 몇 사람을 향해 있을까. 그들의 안녕을 위해 내가 내어줄 곁은 얼마나 되며, 나를 기쁘게 하기위해 조건없이 애 써 줄 그 누군가는 과연 얼마나 될까.
언젠가 불협화음을 겪는 두사람과의 통화 중에 들은 말이 기억났다. 둘 다 아는 이들이었다. " 사람의 인연이란 것이 던져 놓는다고 되나요, 인연도 노력해야 이어져나가는 것이지요. 그는 너무 신경을 쓰지 않아요, 자기 밖에 몰라요. 함께 사는 방법을 몰라요." 다른 이는 내게 말했다. " 억지로 잡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본인이 해야할 몫이고, 내가 관여할 문제는 아니며 끝도 없습니다. 오고 가는 사람 잡지 않습니다. 거기까지가 인연이라면 우린 그런 인연인 것이지요. 나는 거기까지니까 선생님이 그 분 상담 좀 해보세요."
그 둘에 대해 이렇다저렇다 말하지 않았다. 둘 다 맞고 둘 다 틀린 부분이 있었다. 상담과 조언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불편했다. 적어도 상담은 절실한 그 누군가의 요청으로 시발된다. 무턱대고 남의 일에 개입하는 것은 간섭이다. 나는 이기적이라 스스로 구하지 않는 자나 절실함이 적은 자들에게는 시간을 아낀다. 준비가 되지 않으면 별 소용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둘은 충분히 풀어나갈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인연도 가꾸어야 한다"던 말과, '그런 것이 안되면 인연이 아니다'라고 하던 말은 오래 맴돌았다. 그들이 빚은 불협화음은 부부가 아님에도 남자와 여자의 차이이기도 했고, 호감도의 차이, 혹은 자신의 입장에 충실하거나 그렇지 않은 차이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인연에 관한 대화는 언젠가 내가 겪은 일의 일부이기도 했다. 몇 년 전 같은 말을 했던 사람이 있었다. "그런 정도로 깨어질 관계라면 거기까지가 인연"이라던 그 말을 내뱉던 사람. 그런 그녀와의 인연으로 미루어보면, 인연이란 가꾸어가는 것이고 상호노력하며 이어가는 것임을 믿는 이들이, 사람사이의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 때 내가 배운 인연의 법칙은 적어도 관계 유지에 대한 노력을 담보로 했었다. 곁에 소중한 사람을 두고 자신을 수용하지 못하는 이에 대해 인연이 아니라 선언한다면 과연 우리는 누구와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시베리아 횡단열차
두 친구들과 포옹으로 먼 안녕을 고한 뒤 우린 요커버와 이불커버를 씌우고 각자가 열차를 즐길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언제 그들을 다시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내가 그들을 보면 내게 그들은 특별하겠으나, 그들에게 특별할 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인연을 보내고나니 거기 이제 나의 인연이 실재했다. 이불을 깔고 짐을 올리고 가방을 넣고 또 슬리퍼를 신고....... 서울, 광화문 한 음식점에서 불현듯 시작된 인연이 공항과 비행기 그리고 아무르강의 맹추위와 오늘밤 따뜻한 저녁식사를 건너 우리에게 이르고 있었다. 내가 이 여행을 마치고 집에 이르는 날, 우리들은 제각기 어떤 모습에 이르게 되고 또 우리들은 어떤 마음으로 안녕을 고하게 될 것인가. 가능하면 애틋하고 이왕이면 뜨겁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살아남기를 바랬다.
8명이었으므로 4명이 2칸에 마주보고 앉고 누웠다. 4명씩 2팀은 함께 먹고 이야기 나누며 각자가 그리던 시간 속을 달리기 시작할 것 이었다. 우리들 그 누구도 앞날의 우리를 알지 못했다. 단지 시작이었으므로, 내 앞에 앉은 이의 모습만으로 그를 판단하고, 서로를 가늠하며, 또는 서로를 향해 다가서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스스럼이 없는 자가 있었고 자신을 웃음 속에 숨기는 자도 있었으며, 나와 같이 이 여행의 목적따위 생각지도 않고 스트레스원으로부터 잠시 떨어지려 온 사람도 있을 터였다.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살았지만 어느새 타인의 의식을 읽고 마는 나이가 된 지금, 내가 앉은 자리가 가장 나 답기를 바랬지만, 사실 나답다는 것은 나만 아는 것일 수도 있었다.
밤이 깊어 열차 조명이 낮아졌다. 등을 대고 누운 요의 저 밑으로 열차의 규칙적인 리듬이 들려왔다.무거운 소리였다. 열찻길을 따라 길을 헤쳐갈 기관사가 떠올랐고, 그 앞에 펼쳐질 끝없는 어둠을 상상하며 눈을 감았다. 내 옆에 누운 그녀와 그녀 윗칸의 그 녀석 그리고 내 윗칸의 콴에게 안녕을 고했다. 그로서 우리는 눈을 감고 각자의 세상으로 갈 것이며 눈을 뜸과 동시에 아는 얼굴이 되리란 것을 알았다. 낯 선 이들과 이토록 가까이에서 잠들다니, 우린 전생에 무엇이라도 되었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정신을 잃었다. 내가 고단했고 그러므로 그들 역시 고단했을 것이다. "안녕히 주무세요~"라는 소리에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쓰러졌다. 열차소리가 희미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