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사랑스러운 파리
그땐 꽤나 의아했던 일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추측할 수 있는 이유가 분명하지만, 크림 역에 내려 맥도널드 앞에서 기다리라니 이상한 일이라 생각했다. 친절하거나 아니면 무언가 석연찮거나 둘 중 하나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었다. 위치를 알려주면 숙소를 찾아가는 일은 여행 중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굳이 나오신 이유를 나중에 이해할 수 있었다.
조선족 아주머니였다. 돌이켜보면 가장 인상에 남는 민박집주인이다. 파리에서 십 년 이상을 사셨고, 민박을 하시면서 자식들을 유학시키고, 결혼시키고, 고향에 집을 사서 어머니를 모신다고 했다. 딸은 일본에 아들은 파리에 각각 자리를 잡고, 아주머니도 아들 근처에서 민박을 하시는 거였다. 아주머니의 크나큰 슬픔이라면, 고향에 가서 어머니를 뵙고 싶어도 갈 수 없다는 것, 갈 수는 있겠으나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것과, 연로하신 어머니께서 큰 딸인 아주머니를 찾으신다는 것. 결국 아주머니는 프랑스에 들어올 땐 어찌어찌 들어왔으니 그 나중은 장담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야기를 이어가다 무뚝뚝했던 아주머니가 눈물을 훔쳤다. 진한 슬픔에 코 끝이 따가웠다. 파리 시내 모든 전철 노선과 역 이름, 즉 우리가 흔히 보고 다니는 파리 시내 지도를 줄줄 외고 계셨으나 불어를 할 줄 몰랐다. 어디를 어떻게 찾아가는지 지도 없이도 안내할 수 있었으나, 자신이 고향을 향해 갈 수 있는 방법을 모르겠다고 했다. 온통 낯 선 곳에서 마치 섬처럼 사시는 듯했다. 그래도 그 섬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할 재주를 가졌으니, 그건 아주머니의 특별한 복록이었다. 타지에 사셔서 그렇지 명민하고 생활력이 매우 강하신 분이었다. 어떻게 프랑스를 건너 오실 생각을 했고, 또 여기서 자리 잡을 생각을 했을까? 내 힘으론 닿을 수 없는 대단한 힘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첫날부터 아주머니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꽤나 말 없는 내가 말을 트려면 적어도 마지막이 가까워져야 하는 거다. 첫날은 내 일생 돈을 지불하고 사용하는 화장실이 그런 곳일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고, 샤워기를 흘러나오던 물줄기는 어디서 구경하거나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것이었다. 그러나 아주머니가 해주시던 밑반찬들은 그 어디에서도 구경하지 못한 맛이었다. 매우 특별했고 창의적이었으나 맛이 좋았다. 지금도 그때 만들어주셨던 반찬 맛을 떠올리려 애쓸 때가 있다. 잊기 싫은 맛이다.
지금은 어떻게 사시는지 모르겠다. 불어가 몇 마디 더 느셨는지, 여전히 민박집의 식탁은 작은 종지에 담긴 아주머니의 붉은 반찬으로 채워지고 있는지. 고향으로 가셨는지, 아주머니의 어머니는 큰 딸을 만나고 눈을 감으셨는지....... 일 년 전의 일이다. 지난해 이맘때 유럽여행을 생각하다 떠올린 사람이다. 아름답고 멋지고 좋은 건물과 장소를 제치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파리의 기억.
여행은 많은 것들을 보여준다. 튼튼하게 뿌리내린 듯 하지만 부유하는 사람이 되게도 하고, 가벼이 떠다니는 듯하지만 강하고 자유로울 수도 있게 한다. 어쩌면 그런 시간의 연속을 걷게 만드는 게 삶이란 여행이며, 나는 그 여정 중에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여행가방을 싸고 떠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