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다, 뮌헨
대학교 때였지, 착하고 선량했던 그 녀석이 들려준 이름 슈바빙. 녀석을 만난 건 대학교 3학년 미팅 때였다. 그 녀석은 선하고 순하고 따뜻하고 세련된 소년이었다. 그 시대 대부분의 청년들이 그러했겠지만 그럼에도 그 녀석은 다른 이들보다 특별했다. 본성 자체가 선했다. 스물두 살 나쁜 청년들이 가지고 있을 법한 혐오스러운 성품은 그 녀석의 것이 아니었다. 같은 학교는 아니었지만 그 시절을 떠올리면 녀석을 제외하고는 기억나는 일이 없을 정도이다. 좁은 캠퍼스 내에서 마주쳤을 많은 남녀가 있었고, 재미없었던 공부, 과 친구들과의 추억들을 제치고 녀석은 내 기억의 중심에 있다.
나를 향하던 녀석의 눈빛과 웃음이 생각난다. 내 이름을 부르던 녀석의 목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녀석은 참 신사적이었다. 서로 다른 의견에 자기의 것만 강요하지 않았고 내 의견을 존중해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녀석이 얼마나 대단한 심성을 가졌던 인물인지 놀랍다. 그리고 그런 녀석을 대학생활 내내 그리고 이후로도 오랫동안 아는 사람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 축복처럼 느껴진다. 가슴 뜨거웠을 우리들의 청춘시절, 함께 내달렸던 사람들 틈에서도 녀석은 나에게 특별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녀석을 떠올리면 좋았고 고마웠던 기억과 절로 번지는 웃음을 주는 사람으로 남아있는 것은, 나보다는 순전히 그 녀석이 가진 힘 때문이다.
13년 전, 허리 디스크로 꼼짝없이 한 달을 병원에 누워있었어야 했을 때 느닷없이 병실 문이 열리더니 녀석이 들이닥쳤다. 환자복을 입고 있는 내게 "너는 왜 이러고 있냐" 고 책망하듯 물었다. 집안 누군가가 돌아가셨을 때마다 녀석은 제일 먼저 달려왔다. 녀석은 정말 희한하게도, 내가 볼품없고 추레하고 최악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마다 등장했다. 상복을 입고 있거나 혹은 환자복을 입고 있거나...... 나도 멋지게 갖춰 입을 때가 있는 사람이건만 녀석은 어떻게 꼭 그때만 등장하는지, 나로선 정말 미스터리 한 일이었다.
맥주집 붉은 등불 아래에서 녀석이 들려주었던 슈바빙에 내가 서 있었다. 물론 그 녀석이 말했던 그런 저녁이나 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거리에 있었다. 슈바빙에서 메인 시내로 이르는 길로 돌아섰을 때 멀리 걷는 사람 모양의 조형물이 나타났다. 슈바빙을 대표하는 조형물, 사람들은 워킹맨이라 부르기도 한다지. 누구는 책자에 실린 그를 보러 들리기도 할 터였다. 고개를 돌려 그를 보자 가슴이 아렸다. 먼 시절을 돌아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녀석과 나의 인연이, 미루나무 사이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과 겹쳐졌다. 나도 그를 지나 미루나무 사이를 따라 걸었다. 슈바빙은 원래 Leopold 거리 일대를 나타내는 지역명이라 했다. 저녁이나 밤에 왔으면 우리나라 대학로나 신촌 홍대 같은, 젊은이들의 열기로 가득한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관 카페 레스토랑 옷가게 클럽까지, 즐기기에 좋은 테마들에 대학생들이라면 흥분된 밤을 보냈을 것이다. 그 옛날, 그 녀석이 들려주는 슈바빙에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때도, 우리들은 알고 보면 슈바빙을 상상하고 기대했던 청춘이었다.
메인 시내로 이르는 길에 들어서자 상점들이 다양했다. 오래 걷다 보니 가게들이 점점 활기를 띄기 시작한 시간, 거침없이 들어가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했다. 그때 구입한 대용량의 클렌징 파우더 두 통. 판매원은 무게가 나가지 않아 여행자인 나에게 딱 맞는다고 했다. 품질이 뛰어난 제품이라던 그녀의 말처럼, 이것들은 뮌헨의 아침을 상기시키는 즐거운 품목이다.
하얀 봉다리를 기분 좋게 흔들며 다시 신청사 쪽을 향해 걸었다. 거리는 이제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나를 휙휙 지나쳤다. 그때마다 그들이 멋져 보이고 부러웠다. 자전을 탈 수 있으면 여행이 한결 편하고 짧은 시간 더 많은 곳을 돌아다닐 수도 있다. 더구나 이런 시내를 돌아보는 것은 , 특히 영국정원을 자전거를 타고 돌아보는 것은 정말 신나는 일일 터였다. 하지만 모든 것은 꿈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자전거를 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는 일이라며 여러 번 단념한 바가 있다. 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가르며 휙 지나가는 사람들의 실루엣은 얼마나 근사한가 말이다. 언젠가는...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그 언젠가가 언제일지는 장담할 수 없다.
신청사를 지나 다시 숙소를 향해 걸었다. 종 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던 신청사의 시계를 한 번 올려다본 뒤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느새 오후가 되었다. 다리도 뻐근했고 배도 고팠다. 체크인 시간이 두 시간이나 지나있었다. 이제 가방을 풀고 세수도 좀 해야 했다. 사물함에서 가방을 찾아 방으로 올라갔다. 배낭 하나를 지고 작은 가방 하나를 들었다. 2층, 4인실 방의 문을 열었다. 방은 넓다 그런데 아뿔싸~~, 한 침대의 주인공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다. 이럴 수도 있는 거구나...... 그러고 보니 외국 호스텔 중에선 이런 곳도 있다고 안내책자에서 읽은 게 생각났다. 여행 프로그램 속에서 유희열이란 뮤지션은 이런 상황에 대해 신나고 즐거워하더라만, 여럿이 아닌 혼자 겪을 땐 대략 난감했다. 그러나 태연하게 들어가 가방을 내리고 짐 정리를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예의 그 남자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