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SOME NIGHTS

빨간 두건 쓴 아저씨

반갑다, 뮌헨

by 알버트



970122_621762037891780_8791755351904589094_n.jpg?type=w1



10003362_621761994558451_3248211558646002701_n.jpg?type=w1



1526692_621758737892110_2624073375040381552_n.jpg?type=w1



그 낯선 남자는 친절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을 텐데도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 인사가 단지 공간을 함께 나누게 된 사람에게 던지는 의례적인 그들의 말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가 먼저 말 걸지 않았음에도 그는 무척 반가운 듯했다.

나는 우선 양치질을 하고 씻어야 했다. 어제 아침 파리 숙소를 출발해 오늘 오후가 될 때까지 세수하지 못한 몸이었다. 몸이 부으면 정신도 붓는 것인지 멋진 정원을 돌아 6시간 이상을 걸었음에도 붕 뜬 기분은 여전했다. 배낭 안에는 양말 같은 빨랫감도 기다리고 있었고, 흰색 내 외투는 때에 꼬질꼬질했다. 씻고 또 빨래를 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한참 뒤에 마주친 그 남자가 정답게 말을 걸어왔다. 그리곤 빨래를 할 수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핑크빛 연애를 꿈꿨던 청춘시절 많이 듣거나 보거나 읽은 레퍼토리가 있었다. "길을 가는 데 어떤 멋진 남자가 자기를 따라왔고 그래서 어찌어찌하여 썸을 타게 되고......." 같은 그런 일. 그래서 입 밖으로 말하진 않았으나 내심 기대하며 길을 나서는 살짝 흥분되는 일 말이다. 물론 이날 이때껏 뭐 그런 영화나 소설 속의 일은 내 앞에선 전혀, 기필코 단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우린 간헐적인 보상 자극에 잘 훈련된 파블로프의 개처럼 그런 날 것 같은, 기대하는 마음을 잠재우기 힘들다.

아니 다른 사람들은 잘 되겠지만 내 마음은 내가 잘 알았다. 분명 내 안에는 그런 강화의 불씨가 남아있는 지도 몰랐다. 여행이 깊어져 얼얼한 마음에 설레는 일이라도 생겨나 주길 기다리던 음흉함이 들통났는지, 세상이 내 앞에 허락한 그 다정하던 분은 음....... 글쎄....... 가슴 떨린 멋진 사람이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마는, 그냥 아저씨였다. 그것도 내가 참 싫어할만한 요소를 많이도 가지고 있는 아저씨. 뭐, 그냥 말을 걸어주지 않으셔도 내가 다 알아서 할 수 있는데, 자꾸 친절을 베푸셔서 약간 도망가고 싶은 그런 아저씨라고나 할까? '딴생각 마시고 적당히 여행하시고 무사 귀국하시지!'라는 메시지가 내 아래층 침대에 담겨있었다고나 할까!

그래도 말랑한 내 양심은 친절을 베푸는 그 아저씨를 향해 상냥하게 웃고 대답하도록 만들었다. 그래 그건 절대 내 본심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동양인 여자 여행자의, 예의를 갖춘 다소 가식적인 언행이었다. 그랬더니 이 아저씨, 내가 빨래 돌리는 곳까지 따라 내려와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시고, 심지어 돈까지 카운터에서 바꿔다가 넣어주시고 빨래 돌리는 방법을 설명하더니 나중엔 다리미까지 빌려다 줄 기세였다. 아저씨는 이 곳에 머무른지가 꽤 오래되었다고 했다. 여기를 거의 집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거기까지였다. 내가 누군가의 이유 없는 친절을 받을 수 있는 것도 그 수준까지였다. 그래서 난 됐다고 했다. 난 누군가 내 영역에 침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감사하다고 하고, 바꿔다 준 돈까지 정확하게 정산하고 인사하고 돌아섰다.

사방 어둠이 내린 거리에 저녁이라도 먹고 밤거리라도 걸어볼 요량으로 길을 나섰다. 저쪽에서 그 아저씨가 나름 여행의 참맛을 즐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옷을 잔뜩 차려입었고 머리엔 두건도 쓰고 있었다. 흔히 비유하는 이발소 그림처럼, 아저씨는 나이 든 사람이 풍길 수 있는 여유로움과 묵직함이 없었다. 다소 지적인 면모를 갖춘 사람들에게 호감을 느끼는 나로서는 머리에 두른 붉은 두건과 청재킷이 다소 우스꽝스럽게도 보였다. 만약 그 사람이 한 스물이나 되는 아이들이었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웃어 보였을지도 몰랐다. 네 길을 찾아가는 여정이라 생각하면서 어쩌면 응원을 보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나이 든 아저씨의 모습이 불편했다. 그래서 눈에 띄었을 때 고개를 돌렸다. 아저씨의 친절이 과하다고 느꼈던 나로선 그 아저씨의 눈에 발각되어 아저씨가 나를 아는 체하기라도 할까 피하고 싶었다. 이런 여행지에서 사람을 피하다니, 그러나 나는 다소 불편한 상황을 연출할 그 어떤 일들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 아저씨를 떠올리면 다소 애매한 마음이 든다. 무언가 정답을 맞히지 못한 학생 같은 마음이 든다. 이튿날 아침 기차를 타기 위해 새벽어둠 속에서 짐 정리를 하던 나에게 그 아저씨가 내게 말을 날렸었다. 시끄럽다는 말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기차를 타기 위해 준비한다고 했더니 몇 시 기찬데 벌써부터 이러느냐고 했다. 지금 사람들이 자는 게 보이지 않느냐며...... 하는 수 없이 미안하다고 하고 복도에 나와 짐 정리를 했던 기억이 난다.

시그널이 일치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 보낸 두 가지의 신호가 극과 극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꽤 찜찜하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 낸 것은, 이 분이 혹시 그 호스텔에 장기 투숙하면서 여행자들을 도와주거나 하면서 작은 돈벌이를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 그러면 내게 보였던 친절도 이해되고, 카운터에서 내 돈을 받아가 동전으로 교환해다 주는 행동도 잘 매치가 된다. 그랬다면 그때 난 팁이라도 줬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난 여행자가 같은 여행자에게 팁을 준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으며, 단지 지나치게 친절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잔돈을 건네주던 그 아저씨의 눈빛이 한순간 망설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어떤 해석도 맞지 않고, 맞는지 알 수도 없다. 친절이 진심이었는지 혹은 팁을 바란 서비스였는지 모른다. 그 아저씨의 싼 티 나던 모습이 내가 알 수 조차 없는 세계에선 진리로 통할 것인지 아니면 내가 상상했던 아저씨의 모습이 맞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사실 알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안다고 하더라도 뭐 특별날 것도 없는 일이긴 했다. 나이가 들면 나이에 맞게 진중하고 묵직하게 보여야 한다는 건 우리가 만들어놓은 고정된 모습일 수 있다. 그러니 그 고정관념에 맞지 않는다 하여 볼 수 없는 그 사람의 실체를 맘대로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지식과 경험이 쌓여 갈수록 더 자유롭고 가벼워지는 사람이 있고, 지혜와 현명함이 자라 젊은이에 못지않은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 않겠는가.

도처에 사람이지만 그 사람의 마음이나 실상을 쉽게 알기가 힘들다. 그의 입에서 얻어낸 말도 그 마음에 따라 수시로 위장되는 예가 많다. 우리가 보는 것은 단지 내 눈이 내 마음이 보고 싶은, 내가 낀 렌즈에 비친 그 사람의 모습일 뿐 그 사람의 실체는 아니다. 내 렌즈의 색상대로 우린 그 사람을 재단하고 판단하고 결론 내리면서 내게 비친 형상을 그 사람이라 말한다.

어쩌면 도와줘서 고맙다고 말하면서 차라도 한 잔 대접했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차가 맥주가 되고 밥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으나 내가 싫어하는 특정 이미지에 부합한다는 사실은 숨기고, 여러 번의 고맙다는 말로만 인사한 것은 너무 매정했던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진짜 잘 한 행동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과 판단보다도 빨리 내 안의 신중함과 통찰력이 그를 꿰뚫어봤을 수도 있고, 그 흐름에 무의식적으로 발맞추며 처신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매사 균형을 잡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다. 무엇을 위한 균형이며 그것이 궁극적으로 목적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는 것도 힘든 일이다. 그러나 매 순간 인간답고 인간답게 만드는 것을 지향해야 하는 것은 맞는 것 같다. 여행을 통해 보다 인간다워지고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한다면, 이질적인 사람이든 환경이든 열린 시선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날의 아저씨는 지금 생각해도 같이 앉아한 잔 할 수는 없을 듯하지만, 혼자가 아니라 친구 하나만 더 있었어도 나는 용기 있게 그날의 아저씨에게 감사 인사를 드렸을지도 모르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뮌헨의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