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러시아
정신이 들자 몸이 나무토막처럼 무겁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몸으로 어찌 하루를 버틸지 걱정스럽다는 생각이 들 때쯤 어디선가 향긋한 커피 향이 풍겼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를 지난 그녀는 뒷 칸의 나를 돌아보며 "커피 드시겠어요?"라는 말과 함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그녀를 안 지는 불과 몇 시간 되지 않았지만 어색한 이 아침에 그런 미소를 짓는 그녀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얼결에 그러겠노라고 말했다. 한 시라도 커피 없이는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그녀가 알 리 없었겠지만, 타고난 그녀들의 심성은 함께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그 곁에서 나도 물들어가자 했다.
커피에 조예가 깊은 이들이 건너 칸에 있었다. 나중에 보니 둘씩이나 있었고, 여행 쫌 하는 이들이라면 커피에 대해 아는 건가 싶기도 했었다. 도대체가 여행 준비물에 왜 커피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러시아인들이 우리처럼 커피를 일상적으로 마시지 않는다는 것을 나중에 이해했다. 쉴 새 없이 나누어주는 커피 향의 향연 속에 기차에서의 3일이 흘렀고, 규칙적인 리듬을 관통해 간 그 시간 속에서 심지어 내 저렴한 입맛도 어떤 커피가 맛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것을 감별하기 시작한 내 혀가 꽤나 자랑스러웠고 심지어 뿌듯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내 입맛조차 점점 고급스러운 취향으로 향상 시켜주는 마법을 부렸다. 이들에게 여행은 즐거움을 창조하는 과정이다. 기쁨은 수동적으로 만들어진 것만을 취하는 행동이 아니라, 적극 만들어 낸 뒤 골고루 나누어 퍼뜨린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한 봉다리 끌고 간 내 원두마저 여러 가지 향기로 변신해 우리들의 그 시간 속에 스며든다는 것을 여행을 통해 알았다. 향기로운 시간을 이끌어내고 즐거움을 자아내는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
말이 없던 그녀는 알고 보면 준비의 여왕이었다. 내가 가진 음식들을 부지런히 떨이하고 손을 털었을 때 본격적으로 그녀의 깨알 같은 준비성을 볼 수 있었다. 여행을 한 두 번 다녀본 솜씨가 아니거나, 태생적으로 준비성이 뛰어난 인류였다. 내 것이 점점 사라지고 없어져갈 때 그녀의 것들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풀어지고 자연스레 나누어졌다. 나도 슬그머니 손을 내밀었다. 맛있었다. 그런 그녀가 내 근처에 있다는 것이 내가 복이 많다는 증거였다.
기차에서 만난 어린 여학생 둘이 있었다. 콴은 그녀들에게 그녀들이 정해둔 스케줄 내에서 참고하면 좋을 정보들은 부지런히 나누고 있었다. 여행 말미, 알혼섬에서 나와 이르쿠츠크로 나오는 미니버스 안에서 만난 젊은 대학생 둘은 모스크바를 향한다고 했다. 콴은 그들에게, 가서 묵을 싸고 깨끗한 멋진 숙소부터 시작해 볼 것들, 동선 등을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만약 내가 알았다면 어떻게 했을까. 너희들이 나섰으니 너희들이 알아서 헤쳐가고 찾아가 봐라. 뭐 이러지 않았을까? 참 인정머리 없게 그려보는 내 모습이지만, 콴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일일이 알려주더라. 그는 남들도 자신처럼 의미 있고 즐거운, 여행다운 여행을 하기를 바라는 듯하다. 만약 다른 주제가 나왔다면, 나 역시 나눌 수 있었을까? 내 시간 속에 잠겨 들고 싶어서 모른 체하지는 않았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여행 중에 나에게 그 무엇도 물어온 사람은 없었다.
함께 있으면 우리는 사람들은 제법 알게 된다고 착각하기 쉽다. 아니 어쩌면 나만의 착각인지 모르겠다. 여행 기간을 거쳐 여행이 끝난 뒤에야 폭발하듯 알게 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가 그토록 재미있고 창의적인 발상을 즐길 줄 몰랐다. 사람의 눈은 모두 다르고, 살아온 시간 동안 축적해 간 것들은 그토록 차별적이라는 것을 그녀가 만들어내는 문구들에서 읽었다. 그녀의 시선은 유쾌하고 허를 찌르고 웃음을 참지 못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내가 너를 안다고 하지만 결국 나는 나만의 착각 속에 빠져서 열흘을 보낸 셈이었다. 우리 살아가는 동안이 이와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나를 알고 내가 진짜 너를 아는 걸까? 내가 대체 너라는 사람을 알 수는 있는 것일까?
내게 닥친 어려움이 최고인 것 같지만 가끔은 남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내 어려움을 가늠하고 정제하기도 한다. 그녀가 여행을 하는 이유, 닥쳐올 미래에 꾸려갈 삶에 대해 그리고 작금의 상황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할 때, 그 조용한 고백과 삶에 대한 다짐이 넘실대며 내게로 흘러들었다. 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 못할 가없는 그 삶에 그만 두 손 번쩍 들게 되었다. 나에게는 그런 넓고 풍성한 마음이 적다네...., 그 날 그것을 차갑게 알게 된 거지. 어쩌면 순수한 사람들이 순수한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순수한 삶을 일궈내며, 자기 앞의 생에 자기다운 무늬를 입혀가는 건지도 몰랐다. 치열하게 뜨겁게 두 발로 맞서서. 잠 없는 밤, 기억은 여전히 여행 중이다.
새벽, 포트 바이칼로 가는 선착장에서 기다릴 때 시베리아의 추위는 절정을 이뤘다. 여태 한 번도 경험 못한 추위 앞에서 속수무책의 시간을 보낸 사람들 앞에 쇄빙선이 나타났고 뒤이어 우리가 타고 갈 배 한 척이 나타났다. 작은 배낭과 작은 가방으로 짐을 분산했던 나는 신경 쓸 것이 더 많았다. 약한 척추를 견디는 나름의 여행 방식이었지만, 정작 그 새벽에 쨍하게 남아있는 기억 중에는 번쩍 내 가방을 들어 계단을 오르던 콴의 팔이 있다. 바닥이 미끄러워 겨우 계단 밑까지 갔었다. 부탁해서 들어주던 젊음도 고맙지만 말하지 않아도 나누어주는 그 마음이 느껴질 땐 뭉클하다. 고마웠소 그 새벽. 아 그리고 때때로 내 파랑 가방도 들어주었지. 그것도 고마웠소이다.
사람마다 여행 후 남겨진 것들이 다르다. 멋진 정경이 우리 곁에 오래 남지만 시간이 갈수록 함께 한 사람들이 덧입혀진다. 어쩔 수 없다, 나의 여행은 이런 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