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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버트 Mar 10. 2016

내 속에 있는 것은

삶을 기록하다


"그러나 세칭 옥살이라는 것은 대립과 투쟁, 억압과 반항이 가장 예리하게 표출되어 팽팽하게 긴장되고 있는 생활이다. 궁핍은 필요를 낳고 필요는 또 요구를 낳으며 그 요구가 관철되기 위하여는 크고 작은 투쟁의 관문을 거쳐야 하는 판이다.

그런데 그 요구의 질과 양이 실로 빈약하기 짝이 없다. 일광욕 투쟁, 용변 투쟁, 치료, 식수....... 바깥세상에서는 관심 밖의 것들이 거의 전부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것들을 사소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궁핍과 제한을 전혀 받지 않기 때문이며 그것이 생존에 불필요하기 때문은 아니다.

가장 불리하고 약한 입장에서 가장 필요 불가결한 것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이 수인(감옥에 갇힌사람)들을 강하게 만들어준다. 그리하여 다듬어진 용기와 인내와 지구력....... 이것이 곧 수인의 재산인 것이다."
"불행은 대게 행복보다 오래 계속된다는 점에서 고통스러울 뿐이다. 행복도 불행만큼 오래 계속된다면 그것 역시 고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

신영복 선생님의 옥중서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고 있다. 매일 무뎌지고 나태해지고 늘어지는 자신을 어떻게든 구조해볼 요량으로 긴급 처방한 나름의 비책인 셈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하여 여전히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 도움을 주기도 하고, 때론 그 반대편에서 먹고사는 형편이 넘쳐남에도 불행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어떤 시련이 더 혹독하다 나로선 말하기 어렵다. 주어진 환경보다 환경을 수용하는 인간의 능력에 따라 삶의 자세나 태도가 달라진다고 보기 때문에 그러할지 모르겠다. 가난해도 세상에서 빛나는 사람으로 우뚝 선 청년을 많이 보아왔고, 흔히 말해 밥 먹고 살만해도 그 환경이 주는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저 밑바닥을 기는 사람들을 무수히 보아왔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행복해 보이는 삶을 오래 지닌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는 행복의 최대치를 이미 맛보았기 때문에 그 이상의 행복 치를 찾아내야 한다는 부담을 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책을 읽다가 "가장 불리하고 약한 입장에서 가장 필요 불가결한 것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이 수인(감옥에 갇힌사람)들을 강하게 만들어준다. 그리하여 다듬어진 용기와 인내와 지구력....... 이것이 곧 수인의 재산인 것이다."라는 구절이 마음에 와닿더라. 우리를 제약하고 규정짓는 이 모진 환경이, 이 부조리하고 병폐한 사회와 마주한 내가, 거대한 벽에 둘러싸인 채 살아가야 하는 수인이라 생각한다면, 그 감옥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나는 어떠해야 하는가 생각해보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근래 신영복 선생님의 옥중서간을 다시 읽기 시작했지만, 때마 추어 재개봉한 영화 "쇼생크 탈출"을 다시 보게 되었다. 이미 여러 번을 보고 또 본 영화이긴 하지만, 대형 스크린에서 다시 보고 싶었다. 영화 속의 앤디가 감옥에서 보낸 약 20년의 세월은 다른 죄수들이 보낸 시간과는 차이가 있다. 다른 죄수들은 소용없는 짓이라 여기고 그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할 때 앤디는 자신의 힘으로 기회를 만드는 위험을 무릅쓰면서 여느 사람들과는 다른 조건을 만든다. 비록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긴 하였으나 사방 벽으로 둘러싸인,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쇼생크에서 죽지 않고 산 사람으로 살아간다. 저음의 음색이 멋진 레드 역의 모건 프리먼은 앤디가 감옥 속에 지내면서도 마치 자유로운 사람 같아 보였다고 읊조렸다. 교도소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여기는 희망에 대해 앤디는 "희망은 좋은 것"이라 말한다. 원하는 게 있을 땐 몇 년간이나 편지를 써서 도서관을 얻고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독방에 갇혀있을 땐 모차르트와 함께 지낼 수 있다. 영화의 유명한 결말을 모두 아는 처지일 테니 더는 말하지 않겠지만 결국 앤디에게 작용하는 많은 것들은 사실 정신적 영역이다. 물론 영화 속이니까 가능했던 면이 있을 것이다.

신영복 선생님 역시 옥중에서 20년을 보냈지만 우리가 존경할 수 있는 분으로 사셨다. 비록 얼마 전 학교에서 치러진 장례식장에서 영상으로 뵌 분이지만, 그분의 고매한 정신은 20년의 수감생활을 거치면서도 학문과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고 믿는다. 선생님은 수감 시절을 대학생활이었다고 하셨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설마 교도소가 대학이었겠는가. 사회인으로 살다 20년을 옴짝달싹할 수 없이 가둔 그 가혹한 삶에 대한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책에는 모질고 거친 마음 대신 인간적인 고뇌와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만델라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만델라를 다룬 인빅터스라는 영화에서 '불굴의 영혼'이라는 시를 들었다. 그 시를 들으며 오열했던 기억이 난다. 오래전 이야기다. 비슷한 종류의 장면을 보노라면 상황을 보는 생각의 차이가 살아가는 모습을 결정하는 면이 많다 생각 든다.

필요 불가결한 것들의 결핍을 위해 투쟁하던 힘이 수인이 가진 재산이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이고 싶고, 몸을 가둔 물리적 제약 속에서도 그 정신만은 더 활발히 살아있으리라 각오했을 선생님의 마음을 닮고 싶다. 곤궁한 환경이 나를 좌지우지하게 되고 종당에는 내가 그 환경에 굴복하게 되지 않도록, 주어진 희망, 무엇보다 내가 나의 것을 움직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싶다. 나를 압박해도 적어도 내 안에 일어나는 생각이나 마음, 감정만은 내 것이며 남들이 어찌할 수 없다는, 그런 감옥에 갇힌 앤디의 마음으로 살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 날이다.

그러고 보니 빅터 프랭클 역시 나치 수용소에서 생사를 장담할 수 없었던 생활을 견디고 나와 의미 치료를 창시했다. 그리고 나의 이 해석은 의미 치료의 핵심이기도 하겠다. 한 20년 전쯤 이 사실을 읽게 되었을 때 세상 한 부분이 통째로 깨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었다. 그때부터 나로선 참 살기 좋은 세상이  도래한 셈이었다. 책을 읽었다고 해서 외형 상 달라진 건 없었다, 그냥 주어지는 환경을 받아들이는 내 생각에 의해 세상을 다르게 산다는 것이었으니까, 학교라는 제한된 공간에 갇혀 살던 나로서는 멋진 날개를 단 셈이었다. 그로서 맘껏 날았고 자유롭게 살았던 것 같다. 물론 정신이 자유로웠다는 이야기다.

현재 상황으로 미래를 점치기에는 힘든 많은 변수 속에서 산다. 나는 내가 믿는 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주문을 스스로 걸고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그 과정에 성취가 있고 삶이 엮어지는 것이며, 그 과정이 순수한 우리 삶의 본질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어느 날 그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대신 이때까지 걸어온 내 삶과 시간 그리고 그 속에 녹아있는 수많은 것들은 내 것이었고 내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내 속에 있는 것은 유일무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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