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버트 Mar 13. 2016

너와 나의 약속

이 순간을 여행처럼




눈을 뜨자 요일을 가늠해본다. 퇴직을 하고 나서부턴 출근 시간에 대한 압박에서 놓여난 것이 가장 좋다며, 눈 뜰 때마다 몸서리치게 행복해한다. 오늘도 그런 기상. 더구나 오늘은 일요일이니 학교, 세미나, 웍샵, 기타 등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데다 심지어 약속도 없다.

커피를 한 잔 진하게 내려 보온 머그에 담고, 카메라를 챙긴 뒤 밖으로 나갔다. 산수유가 터지는 것을 본 터라 테라스에서 새소리 들으며 커피를 마시겠다는 심산이었지만 어그부츠를 꺼내 맨발에 신다가 도로 들어왔다. 생각보다 춥더라. 보기보단 쌀쌀하고 해가 나지 않아 더 차가웠다. 바이칼을 함께했던 외투를 꺼내 입었다.

샛노란 산수유의 색, 소나무 아래 자라기 시작한 부추, 조팝나무 울타리 근처에서 몰라보게 쑥 솟아 올라 싱싱한 초록을 뽐내는 상사초가 보인다. 아직 백합과 나리는 움트지 않았다. 이사 온 이듬해 사다 심었던 식물들 중 겨울을 이기고 살아남은 건 이 두 종류와 이름을 알 수 없는 허브류 뿐이었다. 향기롭고 화려해 온 여름을 기쁘게 만드는 재주에 해마다 살아 돌아오는 강인함까지 갖추었으니, 대여섯 포기의 그 애들이 마당에 넘실댈 때 난 세상을 가진 것처럼 행복하다. 한여름, 자다 일어났을 때, 깜깜한 어둠 속에서 문득 맡게 되는 백합의 향기는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을 준다.



















추워~ 를 연발할 때 모처럼 여유가 있는 것을 안 것처럼 메시지가 왔다. 희한하다 그리고 기쁘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함께 바이칼을 다녀온 그녀, 서울 나들이를 제안한다. 따스하다. 선약으로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셔도 좋겠단 기대는 바람으로 끝났지만, 불현듯 어느 날 바람처럼 또 만나겠지.

여행하면서 사람을 만나고 바람을 담은 약속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보통 그 약속은 공허하고 잘 실행되는 경우가 흔하지 않았다. 여행 중에 있을 때 우린 종종 지금의 마음이 여행 후에도 같을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난 비행기에서 걸어 나오는 순간 여행의 마법이 풀린다는 걸 느낀다. 그리고 오래되어 편한 시공간과 익숙한 모든 것들로 회귀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는다. 잠겨있던 가방에 지퍼가 열리는 순간 내 지난 여행의 시간과 흔적은 여행의 전리품들과 함께, 현재의 나와 거리를 두고 자리 잡는다. 조금 멀찍이 놓인 기념품들 사이를 나는 자주 지나쳐가지만 여행 후에도 그것들만을 기억하는 삶은 가능하다 여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기억에 묻고 지나친다 하여 여행 속에서 품은 지난 마음들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오늘처럼 흐리고 쌀쌀한 날은 런던 숙소에서 맞이하던 그 아침의 어색한 공기와 창밖 큰 나무의 실루엣이 함께 떠오르고,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이면 영국박물관을 찾아가던 날에 맞던 세찬 비와 추위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출몰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억까지.

여행에서 돌아와 자주 인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몇몇과는 인사하며 지낸다. 신기하게 주로 한국인들은 잘 없다. 아마도 나처럼, 돌아온 자리에서 각자의 삶을 사느라 바쁠 것이다. 여행 중 보여주던 그 밝고 환한 웃음이 일회적인 것이 아니기만을 바라며, 단지 청춘은 청춘에게 끌리는 것으로 내심 정리해둔다. 그러나 다행히도 함께 떠나고 시간을 같이 보낸 사람들은 그 이후에도 여운이 길다. 오늘처럼 불현듯 인사를 보내고 지난 여행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보물처럼 귀하다.

여행지에서 하는 약속을 이제 자주 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이뤄질 것이란 기대 역시 없다. 그렇다 하여 슬프거나 안타깝거나 그런 마음도 없다. 다만 먼 시간을 거슬러 내게로 달려오는 인연이나 달려가고 싶은 사람에게는 주저함이 없다. 약속이란 낱말을 깨고 나온 사람에겐 여행이 일상이 되고 평범한 하루는 또 다른 여행을 만드는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우리의 삶 또한 다채롭게 펼쳐지리라 기대한다. 배고프다. 무언가 먹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속에 있는 것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