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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SOME NIGHTS

파리, 오래 기억될 사람들의 도시

안녕, 사랑스러운 파리

by 알버트




"소매치기 주의"라는 문구가 버젓이 자리 잡고 있었던 파리 북역이 런던에서 파리로 이어지는 유로스타의 종점이었다. 일시에 내리는 사람들 뒤로 작은 배낭과 또 작은 가방을 든 내가 내렸다. 읽었던 안내 책자에 의하면 소매치기가 득실댄다 했으니, 내 가방을 내가 지켜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로 몸도 마음도 잔뜩 긴장된 터였다.


이 곳 북역에서 메트로를 타고 숙소를 찾아가야 한다. 영국에서도 그랬고 여기 프랑스에서도 그랬다, 편리한 게 전철이지만 나라마다 조금씩 달라 무척 당황스러운 것도 전철이었다. 거의 대부분 공항이나 철도에서 전철이 연결되어 있으니 첫 발을 디딘 도시에서 그를 먼저 이용하게 되기가 쉬웠다. 그러니 어리둥절하고 약간은 불안하며 또 어설픈 마음으로 익숙하지 않은 전철 시스템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름도 나라마다 달랐다. 영국에선 언더그라운드, 파리에선 메트로.......


전철을 타러 내려갔다. 왼쪽으로 보이는 화장실에 붙은 '유료'라는 문구에 몸을 움츠리며 전철 노선도를 부지런히 읽어 내려갔다. 내 여행의 전부가 담긴 28리터짜리 배낭 하나를 지고 있었고, 또 작은 캐리어 하나도 끌고 있었다. 약 한 달가량을 생활할 짐을 끌고, 낯 선 전철 게이트를 뚫고 전철에 탑승하는 것은, 나로서는 꽤나 도전이었고 긴장감을 유발시키는 미션이었다. 숙소를 찾아가야 했다.

어렵지 않게 표를 구입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게이트를 통과하려 했다. 사실 이때 표를 넣었는지 댔는지 전혀 기억에 없다. 단지 상식 선에서 게이트를 통과하려는 제스처를 취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그렇다 내 일임에도 때론 기억이 분명치 않을 때가 있다. 파리에 도착해 처음 전철을 탈 때의 기억이 불분명하다. 이는 속으론 쾌재를 불렀다고 고백했으나 내심 긴장하고 있었을 것이라 짐작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남들이 하는 것처럼 통과하려 했으나 무엇이 잘 못 된 것이었는지 내 앞에서 문이 열리지 않았다. 몇 번을 표를 대어 보아도 게이트가 열리지 않았다. 어쩔 줄 모르고 안절부절 때, 키 큰 흑인 할아버지께서 자신의 표를 대고 나를 내보내 주셨다. 그래도 게이트가 열리지 않아 꼼짝없이 서 있을 때 앞서 가던 어떤 아주머니가 게이트를 손으로 잡아당겨 주시고, 심지어 걸린 내 가방을 끌어당겨 주시자 그제야 통과할 수 있었다........ 결국, 표를 찍고 바를 밀면서 걸어나왔어야 되는 것이었다. 그걸 알지 못하는 나는 계속 제 자리에 서서 바가 자동으로 밀려나거나 무언가 작동되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느라고 나는 여러 번 그 자리에서 표를 찍었다. 그런데....... 나를 내 보내고 나서 흑인 할아버지께서 찍으니 표가 작동이 안되었던 것 같다. 또 안절부절하며 쳐다보고 있으니, 걱정 말고 가라고 손짓하셨다.


아직도 이때를 잊을 수가 없다. 그 키 컸던 멋진 노신사의 우아한 몸짓과, 푸근하게 웃어주던 아줌마의 손길, 먼저 가라고 손짓하던 할아버지의 웃음까지....... 누가 봐도 여행길에 오른 사람임을 알았을 것이다. 자신들과 다른 외모의 작은 동양인, 배낭과 캐리어를 들고, 게이트 바가 자동으로 열리기를 가만히 서서 기다리는 그런....... '무슨 열려라 참깨!' 주문을 왼 것처럼.


숙소를 찾아 7호선 Crimee역에 당도했다. 작은 계단들이 여러 번 나타났다. 내 가방이니 내가 들어 올리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옆에서 걷고 있던 동양 아저씨께서 내 가방을 번쩍 드시더니 계단을 올려다 주셨다. 난 괜찮다고 했지만 다음번 계단에서도 가만히 서서 기다리시다가 내 가방을 들어 올려 주셨다. 다음 계단에도, 그다음 계단에도. 또, 게이트를 나가야 할 때가 되자, 아저씨는 게이트를 나가셔서 내가 가방과 함께 나갈 수 있도록 바를 밀어 잡고 열고 기다리셨다. 그렇게 해 주시지 않으셨으면 난 또 어떻게 통과하는지 모르고 눈높이에 존재하는 높은 출입 바, 난 분명 그쪽을 피해 다른 쪽으로 나가려고 했을 것이다. 헤어질 때 한국인이시냐고 여쭈어 봤다. 아니라고, 중국인이라고 하셨다. 난 한국인이시라 그렇게 친절을 베푸신다고 생각했었다. 중국인 아저씨는 웃음을 흘리며 나와 반대방향으로 바쁘게 걸어가셨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쏟아진 많은 친절들, 얼떨떨했다. 사실 영국에서는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그들의 자발적 도움이었다. 그러나 파리에선 숙소까지 찾아오는데 결정적 도움을 서너 번 이상 받았다. 심지어 먼저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다. 영국의 사람들이 꽤나 지적이고 단정하며 격식 있고 교양 있어 보였다면, 파리의 사람들은 잘 웃었고 밝았으며 좀 더 자유롭고 활기차게 느껴졌다. 그러니 도시가 조금 더 젊어 보였다. 뭐 이건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느낌이지만, 나는 파리가 조금 더 사람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다.


파리 도착 첫날 만났던 사람들, 단지 내 곁을 그야말로 스쳐 지나간 사람들. 나는 문득 그들이 생각날 때가 있고, 그때마다 그들이 눈물나게 고맙고 보고싶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다시 만나고도 싶다. 그야말로 불가능한 꿈이란 것을 알지만 진심은 그렇다. 그때를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에 코 끝이 찡하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각인된 파리의 첫인상이다. 찾아보니, 그날 나는 내 카카오 스토리와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었다.


"나는 영국보다 파리를 더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그 이야기를 해야겠다.

잊지 못할 거다."


멋진 풍광들도 오래 기억에 남지만, 여행 중에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야말로 오래 그 여행을 기억하게 만든다. 가란다고 먼저 가지 않고 그 할아버지를 기다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싶다. 계속해서 마음이 쓰이는 그 날이다. 무사히 잘 가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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