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르조마, 조지아
모스크바 경유,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로 떠나는 날 아침.
아픈데 어떻게 여행 가겠냐고 하는 사람들에게,
다 나으면 그땐 다른 곳이 또 아플 거라고 말해두었다.
" 그건 그렇지..."
짧은 대답을 씹는 그들도 분명 나와 같은 생각이라 믿기로 했다.
나를 오래 보아왔고,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들은 짧게 말해도 금방 이해한다. 때론 말이 필요 없을 때도 있다. 누구에게나 그런 사람들은 있다. 처음 본 인상이 진짜 내가 아니라, 그들 말로 "알고 보면 허당"이라는 나를 간파하고 낄낄거리며 놀려대는 그들이라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내게 몇은 되니, 나는 꽤나 행복한 사람 이리라.
리무진에 올랐다.
오랜만이다.
배낭을 지고 작은 캐리어 하나를 끌고 나온 내 행색은 그다지 여행자 답지는 않아 보였을 것이다.
식은땀이 연신 흐르고,
어쩐 일인지 그제부터 컨디션 난조에.
이일 저일 한다는 핑계로 짐은 새벽에야 겨우 쌌다.
떠나는 날까지 반드시 보내야 할 자료가 있다.
리무진 버스에서 코 박고 원고 작성하면서 오느라
안 그래도 살찐 얼굴이 더 부어 터질 듯했다.
공항,
불과 두어 달 전에 보고 처음 본 그는 내게 말했다.
"얼굴이 왜 그리 부었어요?"
"살찐 거예요! 두 달 사이 8킬로가 쪘어요."
누가 듣던 믿지 않을 이야기 같지만, 내 몸무게를 가리키는 저울의 눈금은 매일 아침, 아니 하루에도 몇 번씩 가리켰기 때문에 그것 만큼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그다지 먹지 않아도 살이 찌는 희한한 시절을 나는 살고 있었다. 운동부족과 대사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은 게 문제라고 이 사람 저 사람이 알려주었다. 그들이 그렇다 하니 나는 그런가 보다 하기로 했다. 의사는 일단 살은 찌우지 말라 했다.
"네~ " 하고 대답은 하고 나왔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인가.
처리 못한 자료를 담은 랩탑을 껴안고 탑승구 앞에 앉아있으니
그래도 가슴이 스멀스멀 끓어오르고 셀레기 시작한다.
결국 아홉 시간의 비행시간 쉬지 않고 작업한 결과, 경유지 모스크바 공항에서 겨우 이메일 전송했다.
이런 기막힌 행운이 있단 말인가. 꼼짝 않고 일할 수 있는 아홉 시간이 주어지다니.......
덕분에 눈은 뻑뻑하고 부어올라 내 눈인지 아닌지 짚어보긴 했지만.
할 일을 하나 마쳤다는 뿌듯함이 물밀듯 밀려왔다.
' 모든 여건이 완벽해야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건 아니야. 나의 여기가 삶이 엮이는 장소이자 시간인 걸. 아프면 아픈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여행이 치료제도 되고 휴식처도 되고, 때론 나를 정리 정돈할 수 있게도 해주는 거니까.
그리고 사람들 속에서 나를 더 지켜보게도 해주지. 나는 사람들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사람이 되며, 또 어떤 것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또 그리워하게 될지. 결국 일상을 떠난 내게 마지막 남을 위안은 무엇이며, 나의 소중한 것들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도 알려주는 그런 나침반이자 선물 같은 것. 그게 내겐 여행이니까.
결국 내여행은 정리정돈의 도구이자 치료제이며, 나를 성찰하고 사람들을 관찰하고 삶을 통찰할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이동인 것.'
일을 모두 마친 뒤 여유가 깃든 마음에야 다가오는 낯 선 여행지의 풍경,
나는 모스크바에 와서야 드디어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된 듯했다.
멀리 비행기 뒤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아름답구나.......'
"다녀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