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르조바, 조지아
더위라면 맥을 추지 못한다면 7월의 조지아, 아르메니아 여행이 그다지 쉽지는 않다. 건강한 정상인의 경우라든지 차를 타거나 걷는 것 같은 일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회복중인 몸으로 여행 중이거나, 때때로 주체하기 힘든 땀을 견뎌야하는 경우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요령 좋게 넘기는 일이야말로 하루 중 최대 과제가 되기 쉬울 때조차 뜻하지 않은 행운을 맞이할 때도 있다. 여행 지역인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는 수질이 좋고 물이 풍부한 경우인지, 가는 곳마다 거리 곳곳마다 퐁퐁 식수가 솟아나는 음수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엄청난 땀을 흘리는 만큼 물을 마셔야 무리 없이 여행을 마칠 수 있으리란 믿음으로 물이 보일 때마다 달려들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걷다가 시원한 바람 부는 그늘에서 들이키는 물맛은 물을 즐겨 마시지 않던 사람이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 역시 그러했다. 물을 마시거나 빈 물병에 물을 채우다보면 물을 마시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한 둘은 있다. 뚱뚱한 아저씨부터 시작해 훌쩍 키 큰 청소년, 아주머니와 아이들 그리고 어여쁜 아가씨들까지....... 물론 여느 나라들처럼 가게에서 물을 구입할 수 있지만, 자연스레 길을 가다 물을 마시는 시민들을 보면 낯 선 여행자라도 솟아오르는 물줄기에 입을 갖다 대게 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시원하게 솟구치는 물을 꿀꺽꿀꺽 삼키면서도 이 물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깨끗하게 정수된 것인지, 먹고 별 일이 없을 것인지 궁금해진다.그러나 물을 대하는 시민들의 모습에서 의구심은 수그러들고, 음수대가 보이면 순서없이 달려든다. 아르메니아 예레반에선 도심 곳곳을 걸어 다니다 보면 고개를 숙여 물을 마시는 사람들이 풍경의 하나로 녹아드는 모습을 쉽게 만난다. 아름답다.
한시라도 물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우리들에게 마시는 물에 대한 것보다 더한 신뢰가 있을까. 길을 걷다 물을 보고 마시겠다고 달려드는 일, 의심많은 나여서 그런지는 알 수없지만 한국에선 잘 해보지 않았던 일어었다. 생각컨데 이는 전적으로 그 물을, 공급되는 물 뒤의 사람들과 공급방식 및 관리방식에 대한 신뢰, 그리고 그 음수대를 관장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속한 조직에 대한 전적이고 무의식적인 신뢰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도심 곳곳마다 너울너울 춤을 추듯 솟구치는 물줄기와 목을 적시는 사람들을 보면서, 과연 이런 신뢰가 우리에게 있는지 혹은 나에게 있는지 자문하게 되는 동시에 그들의 현재는 감동스럽고 아름다워보였다.
어떻게 보면, 그 누군가의 발상의 조각들은 우리의 현재가 된다. 거리에서, 공공기관에서, 먹고 사는 많은 공간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곳곳의 그 시작에는 우리의 지금이 만들어진 발상이 먼저 있였다. 한 사람 혹은 한 집단의 아이디어로 구현된 세상에서 우린 산다. 그 때 그들이 만든 세상에 지금의 내가 살고, 우리가 만든 세상에 우리와 내일의 우리가 살아간다. 언젠가 구본형 선생님은 ‘공헌력’이라는 말씀을 한신 적이 있다. 내가 가진 재주로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기를 바라며 하신 말씀이셨다. 그렇다면 내가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조지아 여행 첫 날 저녁 한 식당에 간 적이 있다. 공간을 포함해 음식이 담길 그 모든 것에 함부로 다룰 수 없는 단아하고 고급스런 아름다움이 묻어있었다. 음식의 모양과 맛을 비롯해, 맛, 주인의 태도, 공간의 장식 등 모든 것이 아름다워 오래 머무르고 싶게 만들었다. 화장실은 근사한 집처럼 꾸며져, 한 번 들어가면 나오기 싫게 만들거나 시진을 찍으며 오래 있고 싶었다. 그 공간을 디자인하고 꾸려가는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그 공간에 들어서거나 다녀간 사람이 떠올리는 그 장소는 오랫동안 즐거움을 선물할 것이다.
사람들이 세상에 기여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기여는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의 몫만은 아니다. 물론 더 경제적 여유를 가진 자가 더 베풀 수 있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주위에서 먹고 살 만큼 넉넉한 자들만이 세상을 환히 비추며 세상에 기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는 예는 많다. 세상에의 기여는 우리가 있는 그 자리, 하는 일 속에서, 가진 재능과 자원으로부터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그리고 그 자원은 유형과 무형에 구애되지 않는다.
엘리베이터에서 이웃을 만나면 언제나 미소짓는 아이, 인사를 받으며 아이를 칭찬하는 아주머니, 무거운 할머니의 짐을 선뜻 손 내밀어 옯겨드리는 건장한 청년, 힘든 자를 위해 내 자리는 양보하는 아가씨들....... 그들은 세상을 뜨겁게 데우는 힘이자 태양과 같다. 사람들은 그의 미소 짓는 능력이나 선한 마음으로, 그리고 자신의 안락함을 내려놓는 방식으로 이 세상을 따스하고 웃음 짓게 만든다. 돈이 많은 자산가는 그가 가진 재능으로 돈을 벌어 사회의 편의와 사람들을 위해 나눌 수 있고, 음악을 만드는 사람은 힘껏, 거리를 청소하는 사람도 힘껏, 그 또는 그녀는 그런 식으로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다.
돈을 받고 하는 일이거나 그 일을 해야만 하는 일인데도 아름답다 이름 붙일텐가? 물론이다. 우린 그 돈을 지불하고서도 감동 없는 음식이나 서비스를 경험하거나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형편없는 정책을 펼치는 사람을 부지기수로 만난다. 눈을 마주쳐도 웃지않고, 지나치며 팔꿈치를 쳐도 미안하다 말하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자주 그 서늘한 인간의 마음에 절망한다. 음식 한 그릇으로 배고픔을 달래면서도 불쾌함과 불친절함으로 맛을 잃을 때도 있다. 당연히 누려야할 내 권리가 짓밟혀 분노하게 되는 때가 있고, 가까운 사이라는 미명하에 내 소중한 자유와 영역이 침범당하는 경우 또한 흔하다. 그러니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 말고, 해야 하는 혹은 할 수 있는 일을 하되, 타인을 위한 마음 한 조각을 특별 고명으로 얹어내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아름답다고 이름붙이길 주저하지 않는다. 그 사람들 덕에 내가 사는구나 반성하면서,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의 내가 되기를 원한다. 나 또한 그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되고 싶어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공헌이나 기여는 무엇일지 생각하게 되고, 결국 내가 가진 가장 값지고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것을 세상을 위해 쓸 준비를 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말했다. 남들도 같이 해야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것 아니냐고. 물론 그렇다. 다 같이 움직이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있겠는가. 그보다 빠른 변화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살아보니 사람들이 세상이 그러하던가. 나 아닌 남이 모두 그러하기를 기다려 세상이 따스해지길 기다리기보다는, 남이 그러하지 않아도, 그 생각에 이른 내가 먼저 움직임으로써 세상을 뜨겁게 덥혀나가는 게 더 빠르고 쉬운 일이지 않겠는가. 그리고 다행히 우린, 내가 하고 남이 한 모든 일들을 실시간으로 전하는 시절을 살고 있으니, 이보다 더 멋진 일이 있을까.
조지아에서 아르메니아 국경을 넘어 수도 예레반으로 가는 길, 시골길 가에는 식수가 있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군데군데 표시되어 있었다. 예레반 도심에선, 이 표지보다 먼저 시원한 물줄기가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길을 걷던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숙여 청량한 물을 넘기는 사람들 등 뒤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 뙤약볕 뜨거움을 날려주었고, 물을 마시려던 사람은 등 뒤의 사람들을 돌아보며 한 걸음 물러서던 풍경, 그리운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