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a, Spain
론다의 숙소 폴로에 도착해 메일을 확인했다. 묵었던 숙소 중 깔끔하고 소박한 인상이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던 이 호텔은 바로 옆에 수공예품이 전시된 폴로라는 이름의 매장이 있어서 좋아했던 것만은 아니다. 그다지 친밀하게 주인장과 이야기한 적도 없지만, 이 도시가 마음에 들었으므로 호텔 폴로 역시 내 기억에선 정겹다. 잡혀있는 강의 원고를 보내야 해서 자료 확인이 필요했다. 그런데 첨부파일을 다운로드하여보니 나에게 강의 섭외할 때 이야기했던 방향과 달라 메일을 보내고 나니 새벽이었다. 눈 뜨자마자 답장부터 확인했는데 담당하시는 분은 아직 수신확인 전이었다.
유심칩을 썼는데 해외로 문자도 전화도 안되고 데이터만 된다. 연락방법은 오직 메일. 그라나다 솔 광장에 있던 보다폰 매장에 갔을 때, 당찬 매장 아가씨가 솔드아웃이라 해서 있는 것을 샀더니 이런 일이 생긴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과 맺는 관계도 그룹이 나뉜다. 일하느라 알게 된 분들하고 카톡이나 페이스북 메신저를 쓰게 되진 않는다. 페북 그룹, 카스 그룹, 밴드그룹, 카톡으로 연락되는 사람들, 문자와 전화하는 사람들, 오직 메일, 웟츠앱 그룹.... 등 한 달 넘도록 연락에 답장을 못하게 된 이 번 같은 경우가 되어도 도대체 내가 왜 그런지 모를 이도 많다. 때때로 겪는 결핍은 다양한 방면에 대해 생각게 한다. 내가 어찌 되었든 관심 없을 대다수와 달리, 기어코 나를 찾아내고, 급한 일과 어려운 일을 해결해 주는 사람들이 누군지 알게 해 준다. 집을 떠나서야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도 느끼고, 여행 중 휴대폰이 도난당하는 것 같은 일을 겪다 보면 내 인생에 있어 꼭 연결되어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깨닫게 되는 것을 보면, 여행은 철 덜든 나를 다스리는 좋은 도구일지도 모른다.
론다는 이유를 알 수 없이 여유롭고 마음을 편하게 만든다. 소도시라서 그런 것일까, 론다에는 한 면으로 깎아지른 바위 위에 세워진 건물이 많은데, 이렇게 무서운 도시에 와서 긴장이 풀리다니 신기할 뿐이다. 역에 도착해 택시를 잡을 수 없어 숙소까지 걸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무엇하나 나에게 적당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화려하고 세련되고 멋지고 무언가 대단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과는 잘 맞지 않을지도 모를 도시지만, 한 달 여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금까지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도시가 내겐 론다이다.
사람들은 론다를 깎아지른 절벽 위의 다리가 있는 도시로 기억할지 모르겠다. 사실 고소공포증이 심한 나는 이 다리 위를 지날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난간 근처로 지나는 것과 달리 차로 쪽으로 붙어 앞만 보고 부리나케 달렸다. 누가 보면 웃을 일이겠지만, 저런 아찔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가슴이 아프다(진짜 통증을 느낌, 매우 세게, 마치 수명이 단축되는 듯한 느낌이 ㄷㄷ). 그래도 절벽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밑에서 올려다보며 남들처럼 사진 한 장 찍겠다 마음먹었던 것 같다.
나도 그 사람들처럼 사진을 찍을까? 그들의 열정에 못 미친 내가 어수룩해 보였다. 그들은 절벽이 보이는 곳에서도 바위 위에 올라가 연신 셔터를 눌렀다.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해 통증을 느낀 나는 기념 샷을 남기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왔던 길을 올라가는 반대방향, 절벽 아랫마을 쪽으로 길을 잡았다. 저 멀리 펼쳐진 들판과 아름다운 나무들 그리고 드문드문 자리 잡은 그들의 붉은 지붕이 낮게 앉아 가만가만 숨 쉬는 것 같았다. 마을까지 이르지는 못해도 그처라도 가보고 싶었다.
한 달 여의 여행 중 기억에 남는 장소는 여기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다음이 고흐의 발자취를 따라다니던 아를과 생 레미. 또 사람들을 만났던 그라나다와 바르셀로나 마르세유.
인적 없는 길은 오직 나에게만 허락된 곳처럼 느껴졌다. 올리브 열매인 줄 알고 심봤다를 연발하며 인증사진을 찍고 의기양양하게 한 주머니 주어왔던 것이 알고 보니 도토리였지만, 이름을 알기 위해 숙소 주인장과 이야기했던 시간도 좋았다.
정말 좋다. 떠나기 싫다. 살고 싶다. 이해할 수 없이 끌린다. 전생에 여기가 내 고향이 아니었을까 같은 여러 마음이 론다 외곽길을 걷는 동안 일었다 스러지기를 반복했다. 아무도 없는 그 길을 걷는 동안 슬프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했으며, 외롭기도 하고 충만하기도 했다. 다 가진 것처럼 꽉 차있다가 아무것도 없는 마음으로 돌아서게도 했으며, 넓은 들판과 멀리 앉은 산을 혼자 바라보는 마음은 쿡쿡 마음을 쑤시고 싸하게 식으며 멀어졌다. 내 그림자를 밟고 선 내가 아름답기도 하고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마음도 들게 했다. 이런 모습을 아무도 몰라서 다행이라는 마음도 생겼지만, 누구라도 여기 있으면 이런 기분이 들지 않을까 위로하기도 했다. 고요했고 아름다웠고 눈부셨고 아득했다. 그래서 혼자 걸으며 나는 소리 없이 울었던 것도 같다. 그 모든 것이 너무 찬란하고 행복한 순간이라 그랬던 것도 같다.
론다의 곳곳은 사랑스럽고 자연스러웠다. 저 앞에 난 길 끝까지 가보겠다고 탐험가처럼 나섰다가 길을 잃었었다. 끝까지 갔다가 되돌아 나오는 길, 마을에서 노는 아이들과 인사하고 돌아설 때 트랙터를 몰고 가던 할아버지는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쌍둥이와 아빠의 뒷모습이 아름다워 파파라치처럼 따라갔다. 로즈메리는 나무로 변해 곳곳에서 보라색 꽃을 피웠고, 노란 오렌지는 길 가에서 몽글몽글 숨바꼭질을 했다.
때때로 행복한 순간을 떠올리고 싶어 눈을 감으면, 노란 꽃이 만발했던 들판과 우거진 올리브나무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걷고 있는 내가 보인다. 그때 생각했던 것들은 잊어도 느낌은 남아 마음을 채우고, 지금도 거기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소중한 순간을 선물한 곳, 이름도 예쁘다 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