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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SOME NIGHTS

의도하지 않은 시간

올라, 스페인

by 알버트



마드리드에서 그라나다로 가는 날, 평소보다 일찍 숙소에서 나섰다. 택시로 마드리드 남부 버스터미널에 도착한 시각이 11시 20분쯤, 버스터미널 길 건너에 내려 횡단보도를 건넜다. 내 버스 출발시각은 오후 3시, 장장 3시간 30분을 기다려야 한다.




첨엔 잘못된 시간인 줄 알았지만 표를 들고 안내소에 가서 확인한 결과 맞는 시각이었다. 안내원은 출발 시간표를 보여주며 2시 30분 버스가 있긴 하지만 이미 만석일 것이라 말했다. 매표소 직원이 15시와 16시 30분 표 중 고르라고 하길래 15시를 골랐지만, 내심 저 숫자가 잘못된 12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내 앞의 아저씨가 표를 사는 데 15분 넘게 소비하지 않았으면 11시 30분 버스를 탈 수 있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어림없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플랫폼을 확인할 겸 여유롭게 짐을 들고 나섰다. 여긴 비행기 탑승구처럼 실내에서 기다리다가 버스 탈 시간이 되면 문을 열어 손님들을 태운다. 마드리드에서만 그런것인지는 알 수없다.


3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면 어디서 어떻게 기다리는 게 좋을까? 따뜻한 카페테리아에 들어가서 뭔가 시켜먹으면서 기다리는 방법이 우선 있을 것이고, 훤한 대합실에서 기다리는 방법도 있다. 왔던 곳과 반대쪽으로 올라오니 한 면이 유리로 된 대합실 등장. 냄새도 나지 않고 사람도 많지 않다. 막힌 곳보다는 크고 넓고 깨끗한 곳을 선호하는 편인 내가 좋아할 만한 곳이다. 의자 바닥이 금속이라 차갑다는 단점이 있지만, 댜행히 난 지금 여행 중이지 않은가. 내 짐 속엔 플리스 잠옷 바지에 잠바도 있다는 것. 사 온 물 한 병으로 아침 분량의 약도 챙겨 먹었다. 많은 것이 정돈된 느낌, 좋다. 더구나 밖엔 비가 내린다.





마드리드에서 그라나다행 버스를 안내하는 문구 아래에는 반드시 ALSA버스에 들어가서 버스시간을 확인하라고 했었다. 1시간에 1대의 버스는 있어 보였으므로 무시했는데, 사전에 확인하는 게 좋았을 듯하다. 여기서 기다리는 것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만, 밤 8시에 새로운 장소에 도착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도착해도 안내소가 문을 열었기를 바라며, 또 버스터미널과 내가 가려는 숙소가 그다지 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 번 여행에서 이미 경험했지만, 작은 것들도 무시하면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때론 정말 운이 좋게 일이 해결되거나 찾게 되거나 그런 일도 있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되면 쉽겠지만, 길을 잃고 찾다가 무턱대로 들어간 곳이 찾아가던 장소이기도 하고, 할 수 없이 걷게 된 길이 유명한 볼거리였던 적도 있다.


마드리드 SOL광장에서 마요르 광장을 찾아간다고 가다가 여기가 어디쯤 되는지 가늠할 수 없었을 때 눈 앞에 나타난 곳이 마요르 광장이었다. 그 다음 산 미겔 시장엘 가고 싶어 찾다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산 미겔 시장이란 간판이 보였다. 리스본에서 넣은 유심칩에 문제가 생긴 건지 더 이상 휴대폰 데이터가 작동되지 않았을 때 눈 앞에 보다폰 매장이 나타났다. 나도 모르게 들어가 안내원에게 자초지종을 말하니 위층에 가서 AS를 받으랬고, 결국 스페인 유심칩으로 갈고 작동되기 시작했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뿐만이 아니다. 포르투에서 부터 행운의 여신이 내 손을 잡고 이끌고 있다. 리스본에선 시티버스를 타고 하루 여행했는데, 제로니무스 수도원을 거쳐 벨렘 탑에서 노을을 보고 나니 날이 어둑해졌고 이제 호텔로 가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호텔 기사 왈, 자긴 이제 영업 끝났으니 기다렸다가 다음 차 타고 가랬다. 기사에게 덤덤히 길을 물었더니 죽 직진하랬다. 그 말만 믿고 걸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걷고 있었다. 알고 보니 시간 상 보지 못하고 가겠구나 했던 메인 스트리트였고, 그 길은 호텔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불확실한 상황에 처해도 모든 일은 해결된다는 것을 믿을 때 여행길이 불편하지 않다. ESTACION SUR DE AUTOBUSES, 여긴 마드리드에서 제일 큰 버스터미널이라고 안내되어 있다. 프랑스 방면의 국제버스나 바르셀로나 또는 세비야, 그라나다 쪽으로 가는 장거리 버스가 출발하는 장소 같다. 대합실 내에 검색견을 대동한 경찰도 짝을 지어 순시하고, 공항에서나 봄직한 자동청소기를 탄 아저씨가 내 발밑까지 닦아주는 곳. 찾아도 눈에 잘 띄지 않던 미니 슈퍼마켓도 있고, 아쉬운 대로 커피점도 있으니 부러울 게 없을 듯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엄습하는 차가운 의자의 감촉은 좀 생각해 봐야 할 듯하지만, 현재까지 여기 앉아 뭐라도 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니 이 또한 즐거운 일.


그 사이 내 앞 뒤 옆으로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그라나다에서의 일은 도착해서 해결하기로 하고 버스 출발 전 맛있는 커피와 크로와상 하나를 먹어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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