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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SOME NIGHTS

Note To Self

리스본, 리스본으로

by 알버트



모니터 화면은 –2: 50을 나타낸다. 인천에서 파리 샤를 드골 공항까지 총 열한 시간의 비행시간 중 남은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다.탑승해 배낭을 의자 밑으로 밀어 넣고, 외투를 벗어 트렁크에 넣었다. 장시간의 비행에 최적한 자리를 세팅했다. 짐을 꾸리고, 가능한 만큼 집을 정리하고 오느라 새벽 한 시가 되어서야 겨우 잠자리에 들었고, 자정쯤에 전송된 에어프랑스의 해외발신 문자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결과적으로 출발 시간이 두 시간 지연된다는 사실 하나가 바뀌었을 뿐이지만, 이로 인해 나의 일정은 여러 가지가 엉켰다. 원래 파리에서 리스본행 비행기로 환승 예정이었지만, 항공사가 잡아준 여행 일정 상 나는 샤를 드골이 아닌 오를리 공항에서 환승해야 되었고, 그러므로 짐을 찾아들고 그 공항으로 이동해야 하는 문제가 생겼다. 내린 공항에서 환승 시간 2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공항을 이동해 환승은 처음이다. 또 다른 문제는 리스본에 도착시간이 5시간 늦어짐에 따라 포르투로 향하는 열차와 버스가 모두 끊기게 된 것. 리스본에서 기차로 3시간여 걸리는 포르투가 최종 목적지인 나에게는 눈앞이 깜깜한 상황이라고 밖에. 포르투의 호텔에 연락해보니 예약 변경이 어렵고 이미 비용은 지불된 상태다.





공항에 도착해 체크인을 하고, 전화 로밍과 환전 등 일련의 과정을 거쳐 출국장을 빠져나왔다. 셔틀 트레인을 이용해 113번 탑승구를 찾아가 짐을 풀고 앉았다. 체크인 카운터에서 준 항공사 서비스 팀 연락처로 전화를 걸어 사정을 이야기했다. 드골 공항에서 환승 가능한 비행 편이 없는지, 리스본에서 호텔 제공이 가능한지 등에 대해 문의했다. 상담원과 전화연결도 어려웠지만 들인 시간에 비해 허무한 응답이 돌아왔다. 체크인을 한 상태라 아무것도 변경할 수가 없다. 그게 답이었다. 체크인을 하기 전에 전화를 했으면 어쩌면 에어 프랑스 대신 다른 항공을 타고 출발해 샤를 드골에서 환승하고 목적지인 포르투까지 하루 안에 도착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폴란드 항공으로 바꾸는 대안을 생각했을 때 나는 이미 탑승구 앞에 있었다. 한 번이라도 이런 경험이 있었으면 사전에 전화를 했을 것이고 대안을 찾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었다. 짐을 찾아 다른 공항으로 이동해 무사히 환승할 수 있기를 바라며 여행에서 돌아와 서비스팀에 다시 연락하기로 했다. 리스본에서 다음날 탈 리스본 오리엔테 기차역 가까운 곳에 있는 호텔에 급히 예약을 했다.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일을 처리하고 보니, 무료 쿠폰으로 음료를 마시지도 못했고, 여행용 시계를 사면서도 할인쿠폰도 제시하지 못 했다는 것을 알았다. 정신없는 자신에 짜증이 났지만 이미 다 지난 일. 할인쿠폰은 미련 없이 접어 쓰레기통에 던지고, 음료 쿠폰으로 자몽 주스를 산 뒤 휴대폰 충전을 걸고 서서 밀린 답장을 부리나케 전송했다.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밴드 등에서 생일 축하한다는 인사가 쏟아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내 생일이다. 가족도 아닌 사람들이 나에게 보내는 이런 인사가 특별하게 생각되는 날. 이런 날 나는 내가 어떤 사람에게 어떤 사람으로 생각되는지 가늠하게 되고, 앞으로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고, 따스하게 살아야지 다짐하게 된다. 고마운 사람들, 말 한마디에 이토록 가슴 뜨거워지는 걸 보면 나는 앞으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가운데 자리가 비어있어서 편하게 가는 중이다. 장거리 비행에 이보다 더 큰 행운이 있을까? 리스본 호텔 예약을 끝으로 당황스러운 일은 끝나고 이제 기분 좋은 여정이 기다리고 있기를 바란다. 너무 정신이 없어 꼭 인사하고 와야 할 엄마와 친구에게 인사하지 못 했다. 미리 말하면 걱정하실게 뻔한 엄마에게는 떠날 때 전화하려 했는데 그것도 잊었다. 친구 녀석은 어제까지만 해도 따스한 인사를 건네며 행복한 내 여행을 빌어주었는데, “다녀올게” 라고 말했어야 했다.

눈을 뜨니 승무원들이 간식과 음료를 서빙하는 중이었다. 얼결에 받아들었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약 9시간이 흘렀다. 정신이 들어 영화 한 편을 본 후 도착지까지 거쳐야 할 일들을 정리해 두었고, 여행 중에 보내야 할지도 모를 교사직무연수 원고를 훑어봤다. 추가하거나 보강해야 할 자료들, 정보들을 메모 해 두고, 연구사와 협의해야 할 사항까지 정리해 두고 나니 비로소 여유가 생긴다.몸이 무겁고 눈이 따갑고 아프다. 그래도 이제 조금 느긋해지기 시작했다. 내 앞에 펼쳐질 30일을 그려본다. 지난밤부터 정신을 혼미하게 하던 일은 여전히 진행 중이므로 끝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운 좋게 맛 좋은 자몽 주스를 마실 수 있었고, 급할 때 나를 도와준 직원, 그리고 나를 기억하고 생일을 축하해 준 사람들이 있었다. 프랑스식 기내식이 아주 맛이 좋았으며, 무엇보다 비어있는 옆자리에 감사하면서 가는 중이다. 체크인할 때 내가 안돼 보였는지 직원이 비상구 쪽 자리를 주겠다는 말을 했다. 물론 감사했지만, 창가 쪽을 싫어하는 터라 복도 쪽 아무 자리나 달라고 했는데 앉으니 여기였다. 편안해 보이는 창가 쪽 아주머니께서 바깥 풍경이 담긴 사진을 근사하게 찍어주셨다. 도착시간이 그 사이 –01: 44로 바뀌었다. 몸이 많이 붓긴 하지만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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