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눈빛

학교, 그 애증의 공간

by 알버트



작업하던 자료들을 챙겨 집을 나섰다. 뒷 산을 넘느라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가방을 내려놓고 커피와 스낵을 주문했다. 대구교육연수원과 진행했던 상담 워크숍과 컨설테이션을 끝낸 후 마무리 지을 일이 남아 있었다. 하던 일을 끝내자 옆 테이블의 소리가 들렸다. 담임, 교장선생님, 누구의 어머니, 그 반의 누구 등 네 사람이 나누는 대화의 내용으로 보아 학부모들 같았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학교 선생님을 말하는지 어떤 학원의 선생님을 일컫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편하지 않다. 학교 밖에서 바라보는 학교는 그리 아름답게 그려지지 않는다. 젊디 젊은 학부모들의 눈에 비친 교사는 참 못나서 마음이 아프다. 세상을 보는 우리의 눈이 각기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학교를 향한 모진 말 앞에서는 왠지 친절한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학교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일들이 사건의 본질과 얼마나 다르게 변하는지, 의도치 않은 복병의 등장에 얼마나 쉽게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심심찮게 목격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육아휴직 중일 때 동네 아주머니들과 인사하고 지낸 적이 있다. 하루는 아이의 담임교사가 이야기에 등장했다. 학교 사정을 아는 나로선 수긍하기 힘들었지만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낯 뜨거운 일은 내 앞에서 다양하게 덧입혀졌고 마침내 이 사람 저 사람의 동의를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그 일이 사실인지 아닌지 지금도 알 길은 없다. 휴직 중인 선생이 듣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날 그 장소에서 빚어지던 이야기의 전개가 혹시라도 달라졌을까? 내가 선생이라고 미처 실토할 틈도 없이 학교 이야기를 듣자니 참담했다. 가까운 사람들의 시선 속의 교사들을 볼 때도 마음 편하지 않다. 학교에 대해서는 비판이 먼저이고, ‘방학, 연금, 공무원이란 신분, 퇴직을 강요당할 일이 없는 것’ 같은 교사의 조건이 보통 회자된다. 교사에 대한 이런 인식이 자리잡기까지의 상황을 이해하지만 이럴 때면 ‘한걸음 물러서서 양쪽을 균형 있게 바라보는 일이 우리에게 있어 어려운 일’ 임을 깨닫는다.


코로나-19로 학교가 문을 닫고 아이들은 가정에 머물게 되었을 때도 그랬을 것이다. 출근시간에 모니터와 전화 앞에 앉아 목이 쉬도록 아이들을 점검하고 확인하고.... 온라인 수업 준비, 등교와 온라인 교차수업 준비, 거기다 학교가 문을 연 날은 방역까지 모두 선생님의 몫이었다는 것은 주목하지 않는다. 학교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사람들 정도가 그려볼 수 있는 모습일 뿐이다. 대신 사회에서 바라보는 학교와 교육 그리고 교사는 다르게 읽힌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학교는 5월이 되어서야 주 1회 등교가 결정됐는데, 온라인 수업이라도 충실히 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이 마련되지 않아 분통이 터졌다. EBS 강좌를 30분 시청하는 것이 학교 한 과목 수업 들은 것과 마찬가지라 하고, 화상 수업도 주 2회 30분씩이 전부다. 그것도 촬영이나 녹화는 안된다고 화면에 안내되는데 저작권 문제도 있겠지만, 교사가 자신의 수업을 자신 없어하는 느낌이 더 컸다’.


“1학기 때 EBS 수업이 너무 쉬웠지만 어쩔 수없다고 생각했고 여름방학 때까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2학기에는 화상 수업을 내심 기대했는데 주 1회 하루 30분 하는 게 전부였다. 첫째 날은 출석 부르다가 수업 끝나고, 둘째 날은 안부 묻다가 수업 끝이더라. 교육청에서 교사 재량으로 화상 수업을 하도록 했는데 선생님들은 별 의지가 없는 것 같다. 학원에선 사회적 거리두기가 격상될 때마다 화상 수업을 진행하는데 학교는 왜 못하는 건지 이해하기 힘들다. 생각해보니 ‘원래 공립 초등학교의 수업은 이 정도 수준밖에 되지 않았던 거 아닌가' 싶고, 1년에 2번 시행하는 공개 수업은 교사들이 정말 엄청 준비를 해서 보여준 것일 뿐, 평소 교실 풍경은 화상 수업에서 본 그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 거다’.


코로나-19 시대 교육에 대해 초등학교 1학년 학부모들을 인터뷰 한 글이 어느 여성지에 실렸다. 1년 동안 느꼈던 학교와 교사에 대한 실망, 무너진 기대와 좌절감이 드러나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아이들 교육에 대한 걱정이 울분과 분통 터지는 외침으로 다가온다. 교사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와 학부모로서 바라볼 때는 다른 것이 보이고 다른 뜻으로 읽힌다. 나는 저 글을 읽는 동안 얼굴이 화끈거렸다. 분명 학교를 떠나 있건만 왜 저 말이 나를 향하는 것 같은지. 학부모들의 눈에 비친 학교와 교사는 참으로 한심하고 무능력한 사람들처럼 보인다. 물론 모든 교사를 다 그렇게 보지 않는다. 학교에 따라 담임의 열의에 따라 교육방식에 차이가 난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 잘 안다. 그래서 새 학년에는 좋은 담임 만나기를‘복불복’의 마음으로 가슴 졸이며 기다린다.






교사였던 때에는,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학교나 교사에 대한 비판적인 말을 들으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화나고 억울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퇴직 후 학교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내 생각도 조금은 달라지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교사의 ‘조건들’이 일반 직장인들로서는 갖기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비록 방학마다 많은 시간의 연수를 받아야 했고 아이 없는 학교에서 근무하는 시간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학기를 정리하고 휴식기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직장인들의 부러움을 백번 사고도 남는 일이었다. 몇 평 되지 않은 공간에서 하루 7~8시간 동안 삼십여 명의 아이들과 공부하고 밥 먹으며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았고, 수십 명이 내는 재잘거림이 소음 같아 죽을 것 같을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일 년에 두 번, 방학으로 리듬을 끊어주는 덕에 숨 쉬고 살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랬다. 죽을 것 같이 힘들었을 때쯤 방학이 되었으니까. 그러니 학교가 문을 닫고 온라인 수업과 생활지도를 병행하는 시간을 보낼 때, 사회의 눈에 비친 학교와 교사는 제대로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아 보이는 것도 우리는 이해해야 할 것이다. 상황이 변했다고 해서 그동안 해 온 교사의 업무가 사라질 리 만무하고, 줄어든 업무가 있다면 그 자리는 다른 일이 마땅히 차지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는 일이니.


그런데, 그들은 왜 교사에 대해 학교에 대해 이런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갖게 되었을까? 학교가 놓치는 것은 무엇일까? 학교의 울타리에서 교사라는 이름표를 달고 안전하게 사는 동안 우리가 잊은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의심을 키우고, 믿을 수 없도록 만들었을까?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각자가 처한 위치에서 상황을 바라본다. 학교 안의 사람들은 그들의 눈으로, 밖의 사람들은 그들에게 비친 모습으로 본다. 방학 같은 특별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달라진 교육환경에서 오는 회의감, 괴리감과 싸우고, 학교폭력, 제기되는 민원을 해결하느라 교사들이 소진되어 간다는 것을 학교 밖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주어진 공간에서 정해진 교육과정을 따라야 하고, 아이들이 사이좋게 지내도록 지도하고, 식사 지도, 엉망으로 어질러진 교실 뒷정리와 청소로 아이들이 하교 한 뒤에야 정신이 든다는 것을 교사 아닌 이는 알기 어렵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겠지만 내가 없는 사이 다툼이 일어날까 봐 전담교사에게 아이들을 인계하고 나서야 화장실에 갔던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면, 학교 밖 사람들에게 학교를 온전히 이해시키기란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서로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하고, 타인의 입장을 배려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가 거기 있지만, 학교에서 발생했던 수많은 일의 경과를 보면 우리가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하는지 의심스럽다.


근래는 학급이 편성되면 학부모들이 학급 단체 대화방을 만들어 정보를 공유한다고 들었다. 학급 아이의 부모로 만난 사이지만 부모들은 가상의 공간에서 관계를 맺고, 현실의 교실에서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은 일은 그 공간으로 흘러 들어가서 생명력을 가질 것이다. 그 안에서 다루어지는 이슈는 학부모들의 관계, 각자의 상황과 위치에서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학급에 아이를 둔 부모들이 한 마음으로 공통의 의제를 공유하는 순기능이 있을 것임과 동시에, 여럿이 모인 가상공간이 흔히 그렇듯 잘못된 방향을 잡아가는 역기능도 있을 것이다. 학부모가 아닌 일반인으로서 그 공간에서는 어떤 중요한 논의들이 이루어지는지 무척 궁금하다. 바람이 있다면, 그곳이 집단 지성을 발휘하며 따스한 사랑과 온정이 넘치는 성장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학교를 지원하고 품는 따스한 이들이 함께하는 곳으로 쓰였으면 한다. 학교 안의 이들을 감시하고 가두고 곡해하는 뒷말이 무성한 장소가 아니라, 교육에 관련한 합리적이고 정당한 요구를 하고, 서로에 대한 배려와 이해, 그리고 엄정한 반성과 폭넓은 수용의 태도가 넘치는 학부모들의 세계 말이다.


멀리 비행기가 시끄럽게 지나간다. 며칠 사이 매서운 바람은 사라지고 봄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마당의 산수유는 어느새 노란 별을 잔뜩 달았다. 이맘때쯤이면 으슬으슬 추워지는 시간, 두꺼운 외투에 의지해 교실을 정리하고 또 정리하곤 했다. 교실 집기들을 이리 옮기고 저리 옮겨 보아도 매년 같은 모양밖에 만들어 내지 못하는 내 솜씨가 한탄스럽곤 했는데, 이젠 모두 지난 이야기이다.

작가의 이전글갈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