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의 선생님

학교, 그 애증의 공간

by 알버트



유년기에 내가 만날 수 있었던 직업군은 다양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시내 나가실 때 사다 주셨던 ‘새 소년’에서 보았던 사람들을 제외하면 농부, 선생님, 의사나 간호사, 우체부, 가게 주인, 버스 운전사와 버스 안내원 정도가 내가 사는 세상에 속해있었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오직 하나의 학급만으로 구성된 시골초등학교에서 6년 동안 같은 친구들과 공부했던 시골에서 자랐으므로 그랬을 것이다. 친구들을 따라 간호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지만, 병원에서 주사를 놓는 간호사의 모습에 기겁을 한 뒤, 두 번 다시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내 기억 속의 선생님들은 그다지 멋진 어른이 아니다. 과거의 일 중에 자극적인 것만 선택적으로 기억할 수도 있고 나의 편의에 따라 재구성되어 있을 수는 있지만 담임선생님에 대해 그다지 유쾌한 기억이 없다. 초등학교 때, 퍽 내성적이었던 내가 어쩌다 한 번 숙제를 해 가지 않았던 날, 반 아이들이 모두 바라보는 앞에서 의자에 앉혀놓고 발바닥을 때렸던 선생님이 있었다. 그때 느꼈던 감정이 수치심이었다는 것을 크면서 알았다. 이번 학년엔 하기 싫다고 분명 말했음에도 또다시 부반장이 된 날, 안 하겠다고 고집부리는 나에게 이유가 무엇인지 묻지도 않고 굵은 막대기로 손바닥을 내려치던 선생님도 생각난다. 다음날부터 기억에 나지도 않는 날까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사람의 것이라 보기 어려운 내 손에 매일 안티푸라민을 처덕처덕 발라주셨던 선생님, 그 날 이후 오늘날까지 내 엄지손가락은 힘을 받으면 반대로 제쳐지고 작은 자극에도 아프다. 손가락뼈를 살살 만지면 스물몇 대를 맞은 뒤 나도 모르게 손을 오므리다가 엄지손가락에 빗맞았던 순간이 떠오른다. 어디에선가 읽었던 표현처럼 그때 눈앞에 불이 번쩍했다. 그리고 친구들 보는 앞에서 부끄러움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펑펑 울었다.


중학교 때, 여자 선생님께서 한 무리의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했었던 것 같다. 친구들은 좋아라 하면서 우르르 몰려갔다. 지난 학년 내 담임이셨던 분이었는데, 하루에 세 번 운행하던 버스를 기다리던 동무들이 한꺼번에 사라진 뒤 홀로 버스를 기다리던 그때의 아득함이 슬프게 남아있다. 그 날 선생님이 어떤 일로 그런 이벤트를 열었는지 나로선 알 수 없다. 친구들에게 무언가 상을 줄 일이 있었던 날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 저 아이들만 선생님 집으로 갈 수 있는지, 내가 그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없는 백가지 이유가 있었다 해도 느닷없이 맞닥뜨린 그 사건은 중학교 시절을 기억하는 내 마음을 싸르르 훑고 지나간다.


고등학교 때는 버스로 한 시간 거리를 등교했다. 그 시절 내가 타던 마을버스는 자주 고장이 났고, 장마나 눈에 운행을 거를 때도 있었다. 그날도 간 밤에 내린 비로 길이 끊겨 겨우겨우 버스가 길을 내며 돌아서 나아갔고 나는 난생처음 지각을 했다. 크고 텅 빈, 조용한 학교 운동장을 혼자 들어설 때의 기분이라니, 소심한 나에겐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허겁지겁 교실로 가 담임선생님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선생님은 웃으시며 알았다고 하셨다. 그리고선 지각으로 처리를 하셨다. 지각을 했으니 지각인 것이었겠지만, 속으론 그 웃음이 따스했다 말하기 어려웠다고 실토한다. 우리 반에는 배만 아프면 지각을 하거나 집으로 가는, 꽤 부유한 집 아이라는 소문이 돌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 왈, “배가 아픈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늦게 와도 선생님이 지각처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친구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나로선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은 뒤죽박죽이었다. 만약 내가 그 지각한 날의 담임이었다면, 눈물이 글썽글썽해서 생전 처음 지각한 원거리 통학생에게 “버스가 늦어서 마음 졸였겠구나.”같은 말을 한마디라도 해줬을 것 같다. 결국 그날 한 번의 지각으로 나는 고등학교 3년 개근상 대신 정근상을 탔다. 새벽에 일어나 왕복 두 시간을 통학한 실적 치고는 대단한 성실함이라는 자부심은 있지만,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지각생이 되었던 그 날의 기억은 상처로 남았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기억, 고등학교 때 아직 두발 자유화가 되기 전, 앞머리를 자른 아이들은 복장 검사에서 선생님으로부터 지적을 받았다. 하필이면 청소년기 내 앞머리는 한꺼번에 자라느라 꼭 일부러 자른 것처럼 보였다. 전교생이 모인 조회에서 줄지어 선 우리의 머리를 훑던 선생님이 나를 보시더니 다짜고짜 왜 앞머리를 잘랐냐고 물으신 것을 보면 그렇다. 나는 아니라고 했지만, 내 말은 믿지도 않고 옆 반 아이들도 보는 강당에서 가짜 같은 눈웃음을 지으며 내 머리를 툭툭 밀치던 담임선생님이 저 밑 묻힌 기억 속에 있다.


학생으로 사는 동안 경험한 내 불쾌한 일들 속 주인공은 선생님들이다. 활동 반경이 넓지 않았던 학생 신분으로서는 자연스러운 귀결이겠지만, 그때 아이인 내 눈에 비친 선생님은‘그다지 멋지지 않은, 아이들 마음도 하나 읽을 줄 모르는, 아이들을 차별하는 시시한 사람’이었고, 그래서였는지 선생님들이 그다지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꽤나 당돌함을 숨기고 살았던 아이이었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 시절 나는 그랬다. 그렇다고 해서 선생님으로 사는 동안 내가 그 선생님들 같지 않았는지는 자신하지 못한다. 돌이켜보면 미안한 기억으로 남은 두 세명의 아이가 떠오르기 때문에 결코 아름다운 선생님의 모습으로 남아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어릴 적 내가 느꼈던 기분을 아이들에게 주지 않으려 애썼던 것만큼은 진심이다.


지금은 아침 8시, 나보다 먼저 일어난 까치와 새들이 마당 흙 위에서 분주하다. 신기하고 아름다운 새들의 모습과 천천히 물을 올리는 나무들을 보면서 이 글을 쓰다 보니 지난 기억에 숨이 가쁘다. 유쾌하지 못한 일을 돌이키는 일은 내 마음에 생채기를 낸다. 기억 속의 선생님을 소환하느라 잠시 슬펐으나 창 너머 기다리는 찬란한 하루는 나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