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SHIFT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버트 Mar 10. 2021

표정 환한 아이들의 비밀 하나

학생 그 너머



한 가족을 만났다. 초등학교 6학년과 3학년 남자아이 그리고 부모로 구성된 가족이었다. 아이들은 어떤 것을 먹거나 하기 전에 엄마에게 물어보고 허락을 받았다. 마치 내 학급의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일이. 부모의 말투는 엄하고 가르치려 드는 듯했다. 아이들은 엄마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엄마는 많은 시간을 할애해 아이들에게 과외활동을 시키고 도서관에 데려가 함께 공부한다는 것을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가족을 보면서 궁금했다. ‘이토록 헌신적인 엄마와 함께하는데 왜 이 아이들은 밝게 웃지 않지? 왜 서로 바라보면서 농담을 하거나 능청스러운 장난은 치지 않지? 왜 아이들은 기회만 되면 상대에게 잘못의 원인을 떠넘기고, 작은 빌미에도 언성을 높일까?’ 아이들이 서로 다툴 경우 엄마는 잘못한 점을 아이들에게 하나하나 지적했다. 또 미처 끝내지 못한 과제나 일이 있을 경우, 반드시 그것을 마쳐야 무엇을 하거나 가질 수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아이들을 향한 낮고 부드러우며 따스한 목소리, 아이들과의 친밀감이 느껴지는 접촉, 있는 그대로의 아이를 받아들이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아이들에게 어떤 상황을 이해시키거나 수용하는 모습보다는 통제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듯 보였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무표정하고 생기가 없었다. 몇 번 지켜본 바로는 그랬다. 내가 목격한 이외의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아무것도 자기 뜻대로 할 수 없는 시간 속에 갇혀 사는 사람들처럼 즐거운 표정은 짓지 않았다. 안타깝고 애처로웠다.  


   그 엄마의 양육태도가 아슬아슬해 보였지만 그것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양육의 결과는 당장 알 수 없고, 내 고약한 상상이나 불길한 예측이 통쾌하게 빗나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도움을 청하지 않는 이에게는 누구의 조언도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어쩌다 보게 되는 그 가족에게 간섭하는 듯한 행동은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 수 있었다. 다만 다시 만났을 땐 내 짓궂은 예감과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을 뿐이었다. 


   주변에서 자기 방식을 고수하며 자녀들을 조종하다시피 하는 부모들을 만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런 이들은 타인의 의견을 수용하는데 소극적일 뿐 아니라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무시하거나 배타적으로 비치는 경우마저 있다. 부모들의 과잉 열정이 빚는 가족 간의 불협화음은 가족상담의 흔한 주제이며, 부모의 억압적 태도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인공의 어두운 성장 배경을 설명하는 단골 메뉴이기도 하다. 자기 만의 틀을 가진, 딱딱한 껍질에 쌓인 부모는 어쩌면 교사보다 더 문제를 잉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재직 중 경험에 의하면 학급에는 일일이 엄마의 의견과 결정에 기대는 아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저학년일수록 그런 경우는 흔했고, 고학년이 되어서도 엄마의 의견에 좌지우지되는 아이들이 상당수였다. “엄마가 하지 말라고 했어요” “엄마에게 물어봐야 되는데요” 같은 표현은 아이들에게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일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현재는 이런 현상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날 수도 있다. 아이들이니 당연히 부모에게 의견을 구해야 할 테지만, 사소한 것 하나까지 엄마의 의견이 중요했고, 부모들 또한 자녀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행동했다. 자녀 뒤에 버티고 서서 아이의 의견을 대신하는 부모의 존재를 느낄 때, 아이를 휘두르는 것처럼 보일 때, 교사는 그 아이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일이 쉽지는 않다. 타협의 여지가 없는 부모라는 생각이 들기라도 하면, 작은 일로도 오해가 빚어지기 쉬울 것 같아 부모에게 학생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자녀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는 학부모는 확고한 생각이 있어서인지 자신과 아이의 모습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아이가 부적응 행동을 하거나 문제라도 일으키는 경우라면, 문제의 원인을 자신을 제외한 곳에서 찾으러 들어 교사와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 때도 있다. 자신의 양육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일 수도 있고, 그런 인정이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것이라 생각해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학부모가 취하는 그런 태도는 상황을 악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주도권을 잃은 경험이 누적되면 사람들은 수동적이 된다. 아이들 역시 그렇다.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고, 해 봐야 소용없다는 결론에 이르면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진다. 그 상태가 오래 지속될수록 자신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다. 아이들이 가정이나 학교에서 부모나 교사의 기대와 평가에 민감하며, 타인의 기대에 미쳐야 인정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가치관을 내재화하게 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다 할 수 없다. 아이들이 누군가로부터 꾸지람이나 잘못을 지적당할 때 짜증내고, 화내고, 분노하는 경우는 그나마 세상을 향해 자신을 표출할 힘이 있는 경우이다. 그런 힘마저도 갖지 못했을 때 아이는 자신을 향해 다양한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한다. 이는 아이에게 심각한 손상을 유발한다. 어쩌면 우리는 부모나 교사의 뜻을 거스르고 아이가 제 멋대로 하려는 반항을 고마워하며 반겨야 할지 모르겠다. 아직 그에게는 중요한 사람들에게 대적할 힘이 남아있다는 말일 수 있으니까. 어린아이들이 부모라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의 그늘에서 자신의 것들을 숨긴 채 사는 일이 그리 신나지는 않을 것이다. 부모의 기대와 의도에 맞추어 살라니, 그것도 행복한 표정으로, 쉽지 않다. 자기 마음을 숨기고, 하고 싶은 것을 지연시키면서, 타인의 의도에 맞추어 살아주는 인생이 즐거울 리가 없다. 


   어쩌면 우리는 교사 혹은 부모라는 이름으로 아이를 교육한다는 미명 아래 아이의 결정권을 틀어쥐고 무지막지하게 흔들어대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 과정에 심취해 아이들이 오늘 어떤 표정으로 살아있는지 읽는 법을 잊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이들이 제 마음을 깊이 숨겨둔 채 부모와 교사를 따르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모습을 온전하게 흔쾌히 드러내는 삶을 사는지, 그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현명함이 필요한데 과연 교사로서 우리는 그런 준비가 되어있는지 그것도 알 수가 없다. 


   상상이 너무 멀리 온 것 같다. 그 가족의 미래가 어둡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 왜냐면 우리에게는 현재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미래를 선택하지 않을 가능성은 언제든 열려 있고, 변화하고자 시도하는 사람 앞에서는 불리한 조건들도 약화되기 때문이다. 아이가 문제를 일으키든, 어느 날 그 부모가 깨우침을 얻든 아니면 그 어떤 기제들이 작동하든, 엄마보다는 그 아이들이 스스로 만드는 미래가 보고 싶다. 무표정한 모습, 형식적으로 예의와 격식을 갖추는 모습에서 벗어나 더 자주 웃고, 아이다운 실수와 스스로 도전하고 실패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아이들이 부모의 기대를 벗어나는 것에 너무 쪼그라들지 않기를 바라며, 점점 더 자신을 좋아하게 되고, 자신을 믿기를 바란다. 부모와 세상의 입맛에 맞지 않아도 자신은 충분히 아름답고 빛나는 존재임을 알게 되기 바란다. 


   표정 환한 아이들의 비밀 하나, 그다지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물어보면 된다. 소소한 것 하나하나 물어보는 것이다. 만약 부모라면 “내가 너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했으니 이리 와서 먹어라”가 아니라 “내가 너를 생각하면서 스파게티를 했는데, 먹어보겠니?”라고 묻는 거다. 먹겠다고 하면 부모가 보기에 그럴듯한 그릇에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이 스파게티를 담아먹고 싶은 그릇이 있니, 있으면 가져다 줄래?” 하고 요청하는 것이다. 아이를 위해 밥상을 차려놓고 빨리 앉아 먹으라고 하기보다 “지금 먹을 거니?” “어디에 앉을 거니?”라고 묻는다. 만일 그대가 선생님이라면 “그 과제를 지금 할 거니 아니면 집에서 할 거니?” “점심을 먹고 교실에서 놀거니 아니면 운동장으로 나갈 거니?” “종이 울리기 5분 전에 들어올 거니 아니면 3분 전에 들어올 거니?” “물을 컵에 받을 거니 아니면 네 물통에 받을 거니?” 같은 질문을 아이들에게 하면 된다. 


   어떤 선택을 할지 아이들 본인에게 맡기면, 표정이 밝아지고, 적극적이고, 자신감을 갖게 된다. 작은 선택조차 해 보지 않은 아이가, 작은 선택권도 가져보지 않은 아이가 어떻게 삶의 중대한 결정 앞에서 자신 있고 담대하게, 자신에게 꼭 맞는 옷을 찾아 고르고, 입을 수 있겠는가? 무슨 수로 스스로 자기를 이해하며 진로를 결정하고 꿈을 향해 나아가겠는가? 자기 결정권 또는 선택권을 가지지 못할 경우 우리는 자신의 의지대로, 뜻대로 살지 못한다는 자책과 열등감에 시달린다. 억울해서 세상을 향해 울부짖는다. 못마땅해하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남이 가지는 것을 허용하기 어렵다. 나는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이 친구에게 주어지는 것을 견딜 수 없다. 그래서 다투고 고자질한다. 


   삶의 매 순간을 주도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서 뺏을 수 없는 중요한 가치다. 아이들에게도 이는 마찬가지다. 친구와 떡볶이를 먹는 아이가 즐거운 이유는, 떡볶이 국물에 튀김 만두를 찍어먹든, 떡볶이에 든 어묵만 골라먹든, 어묵 국물을 종이컵에 담아두든 그런 사소한 선택을 자유롭게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길을 가다 악사들의 리듬에 자유로이 춤출 수 있는 아이는 제 의도가 사사건건 제지당하지 않았던 충분한 경험이 있음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야기 하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