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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대건 Sep 16. 2019

kyrie Eleison

정의길의 ‘이슬람 전사의 탄생’은 공포를 재구성하는 책이다.

일찍이 밀란 쿤데라는 말했다. 인간은 이해하기에 앞서 심판하고자 한다고. 우리는 그들을, 테러를 정의라 주장하는 이들을 심판하려는가, 이해하려는가 물어야 한다. 물론 우리는 그들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심판도 할 수 없다. 정의길의 책을 보라. 이슬람은 이미 이성의 영역을 넘어섰고 세계는 흔들리고 있다. 이제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인정받기를 원한다. 또한 경고하는듯하다. 처음부터 이 세상은 공포와 분노로 인해 죽고 죽이는 세상이었노라고. 잠시나마 50년 남짓 우리는 서로의 평화를 인정했으니, 이제 그만 원래의 혼돈으로 돌아가야 된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다만 세계의 변방에 서 있는 우리는, 겨우 걱정할 뿐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잘못한 것이 없으니 그들이 우리를 해할 이유도 없겠지’라는 안도 아닌 안도와 함께 말이다. 적어도 우리에겐 그들의 선지자를 욕하는 샤를리 엡도가 없다. 그러나 이번 IS의 파리 테러 이후 사태는 전환되었다. 자신들의 편이 아니라면, 다 적으로 설정해버린 것이다. 세상은 안전한 곳과 그렇지 못한 곳으로 나눠져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모든 곳이 위험해졌다. 막연했던 공포의 실체적 실현은 우리의 위치를 옮겨 공포로 옮겼다. 광화문 앞 미국 대사관이 폭탄테러로 날아가지는 않을까? 청담대교가 무너져 내리지는 않을까? 강남역이 통째로 날아가고 동시에 삼성 사옥도 무너져 내리진 않을까? 안전한 세상은 사라졌는가?


시리아 출신으로 UAE에서 활동하는 한 아나운서는 테러 이후, 이렇게 말했다. “경애하는 파리여, 그대가 본 범죄를 슬프게 여겨요. 하지만 이런 일은 우리 아랍 국가들에선 매일 일어납니다. 전 세계가 그대 편이 되어줌을 그러 부럽게 여깁니다.” 슬픔에 대한 상대성은 우리가 처한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 대부분 사람들은 우리가 프랑스 파리와 가깝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어떤 면에서 오히려 시리아와 가깝다고 말할 것이다. 국가의 존재를 믿을 수 있냐, 없냐는 측면에서 말이다. 


우리는 어떤 국가를 경계해야 한다. 지금 그 국가는 우리의 안전을 인질로 삼고 믿지 못할 일들을 벌이고 있다. 국정원에 정보와 권력을 몰아주는 테러방지법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스마트폰에 부착된 GPS를 사용, 개인의 위치정보를 검색할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한다. 테러 용의자 식별을 위한 복면금지법안도 만들어지고 있다. 앞으로 국가에 반대하는 모든 시위는 테러로 규정될 것이다.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국가라는 이름으로 칼을 휘두르고 대포를 쏠 것이다.


감히 확신한다. 만에 하나 테러의 위협이 있을 때,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조용히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 하는 삶을 살아가는 소시민일 것이라고. 경찰은 힘 있는 자의 주구가 될 것이고, 검찰은 힘 있는 자의 눈치만 볼 것이다. 이 국가에 대한 불신에 근거는 많다. 선장의 살인죄 판결이 내려진 세월호 법정, 정작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정부 측 관계자들의 책임 방기에 대한 심판은 이뤄지지 않았다. 기소 자체가 없었기 때문. 국민의 안전?! 그런 고귀한 것이 대한민국에 남아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도 IS가 무섭다. 하지만 횡단보도에서 비보호 우회전하는 차량보다 무섭지 않다. 그러나 저 국가는 더 무섭다. 댓글 달기도, 글을 쓰기도 망설여야 하는 저 국가가 더, 더 무섭다. 공포를 넘어서는 현실로 만들어지고 있다.


영화 ‘월드워 Z’는 국가의 존재에 대한 인상 깊은 장면이 나온다. 사람이 좀비에게 물리면 전염돼 뇌가 파괴되고 이성을 잃는다. 그리고 좀비가 된다. 중국을 비롯한 수많은 나라들이 좀비로 가득 찼다. 그런데 북한에는 좀비가 없다. 왜일까? 위생, 검역도 수준 이하이며 공권력이라 해봐야 거의 없는, 이제 국가라고도 할 수 없는 나라에서 말이다. 이유인즉슨, 북한은 나라의 모든 인민의 치아를 뽑아버린 것이다. 전염이 되지 않도록. 다시 보자. 좀비는 무엇인가.


IS의 세계에서는 음악도, 춤도, 술도, 축구도 심지어 연애도 허락되지 않는다.(목수정) 그들의 공간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이유를 부정했다. 이 광적인 근본주의자들이 과연 좀비일까? 아니다. 그들은 좀비가 아니다. 그들로부터 비롯되는 공포, 그리고 그 공포가 만들어내는 인간에 대한 적대와 혐오, 그것이 바로 좀비다. 우리는 좀비가 되지 않기 위해 또 다른 좀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부질없는 바람과는 달리 적대는 커지고 비참한 현실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15.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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