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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kdaegeon Sep 19. 2019

가벼운 나날들

영근의 이야기

며칠 전, 술을 많이 마셨고 이것저것 많이 잃어버렸다. 지갑과 그 안에 담긴 신용카드와 신분증,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뽑아 놓은 15만 원, 아이팟 터치, 기껏 챙긴 새 우산, 천 년 된 나무로 만들었다는 일본산 볼펜, 휴대용 와이파이 에그, 터키산 머플러, 무향 핸드크림 등


그런데 이상하게도 짜증 나지 않았다. 아깝지도 않았다. 그저 ‘죽지 않은 게 다행이네’ 싶기도 했다.


다만, 마음이 문제였다. 인정 끝의 느낌에 닿은 순간, '무언가 떠났구나' 알게 된 순간의 무력감 같은 것이 만져졌다. 시인 유종인이 노래한 ‘어떤 무력감’이 말이다.


시인의 <사랑이라는 재촉들>은 ‘눈이 오는데 나에겐 개가 없다’는 구절로 시작한다. 눈이 와도 나는 뛰어놀 수 없고, 나 대신 놀아줄 개도 없으니 무력하다. ‘부재’의 인식은 동사가 아니라 형용사를 부른다. 무력감은 ‘할 수 없음’이 아니라 ‘느낄 수 없음’이다. 


곧 사라질 몇 가지 느낌을 잡는다.


동전 담는 카드지갑. 재하가 이탈리아에서 선물로 사다 준 얇은 가죽지갑이다. 항상 동전을 가지고 다녔던 나를 배려한 선물이었다. 동전이란 게 막상 필요할 때 없다. 200원만 있으면 되는데 그게 없어서 800원이 생긴다. 또 작은 돈을 아무렇게나 쓰는 게 싫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 지갑은 동전주머니가 없다. 그래서 동전만 담는 지갑을 가지고 다니기도 했다. 귀찮지만 그렇게 다녔다.


이런 나를 위해 재하는 밀라노 어디쯤 가죽공방을 찾아내 동전주머니가 달린 지갑을 구해왔다. 그 카드지갑의 동전주머니는 지폐만큼이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지갑을 사용하며 지폐는 미끄러지듯 쉽게 들어왔다가 빠져나갔지만, 동전은 그렇지 않았다. 번거롭게 담아내야 했고, 가끔 쓰려고 꺼낼 때에도 수고스럽게 손바닥 오므려 받아내야 했다. 한 손으로 지갑의 다른 편을 잡고 주머니를 벌려 엄지와 검지를 써서 동전을 하나씩 꺼내야 했다. 그렇게 지갑은 내게 자신의 존재를 항상 알려왔다.


동전주머니가 거의 찼을 때의 묵직함도 좋았다. 그 지갑은 작은 것의 존재를 주목하게 해 주는, 아마도 내가 가진 것들 중 가장 품격 있는 물건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 지갑 속 동전주머니는 여닫을 때마다 버튼에서 딱딱 소리가 났는데, 불안할 때마다 나는, 지갑을 꺼내 열고 닫았다. 똑딱똑딱하다 보면 내 마음도 어느새 안정을 찾았다. 이상하게도 그랬다.


잃어버린 가죽지갑은 그런 특별함에, 유일함도 가지고 있었다. 재하가 유럽에서 돌아오던 날, 그녀는 인천공항에서부터 선물 기대하라며 그렇게 생색을 냈다. 그녀는 방으로 들어와서 무거웠던 캐리어도 아무렇게나 던져둔 채, 내게 자신과 지갑부터 안겨줬다. 지갑은 가죽의 촉감과 동전지갑까지 완벽했다. 항상 내게 원하고 바라던 지갑이었다. 물론 그녀가 줬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겠지만.


게다가 지갑 안쪽에는 음각으로 작게 내 이름 이니셜 각인도 있었다. 그녀가 밀라노 공방에서 직접 새겨온 것이었다. 하지만 찬찬히 보니 그녀는 나의 이니셜 중 G로 해야 할 것을 K로 잘못 해왔다. 난 그걸 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작은 물건에 다소 까다롭던, 그러지 말아야 했지만, 그런 평소의 나를 알던 그녀는, 그런 내가 기뻐하는 반응에 기분이 더 좋았나 보다. 굳이 자신이 손수 내용물을 옮기겠다면서 먼젓번의 지갑에서 카드를 하나하나 끌어냈다. 그러다가 내 신분증의 영문 이름을 보더니 K가 아니라 G임을 알아챘다.


그녀는 자신은 정말 몰랐다고, 너무 미안하다며 한참이나 울었다. 밀라노 가죽공방에 택배로 보내 새 지갑으로 다시 받자는 것을 말리고, 또 말려야 했다. 난 별 것 아니라면서 괜찮다며 위로했다. 


자신의 미안한 마음을 또 몰라주니 그게 또 상처였다. 그녀는 몇 번 더 눈물을 보였다. 한나절을 꼬박 어르고 달래야 했다. 마침 여권을 새로 만들 일이 있으니 겸사겸사 이제부터 G 대신 K로 새로 쓰겠다고 약속까지 했고, 날이 지나서야 겨우 진정되었다. 눈물로 물든 지갑이었다.


대부분 인연이 그렇듯, 재하와 헤어졌다. 그 후, 나는 지갑을 서랍 어딘가에 두었다. 그 사람으로부터의 물건은 그 사람과의 시간을 떠올리게 하고, 그 사람을 찾게 하기 마련이니까. 어쩌면 지갑 혼자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들었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몇 달 전, 청소를 하며 이 지갑을 발견했다. 마침 지갑이 없어 며칠 가지고 다녔다. 지하철 개찰구를 지날 때마다 그녀가 떠오르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생동감은 사라졌고 잊었음을 실감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잃어버린 지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오롯이 다시 살아났다.


닳아 희게 된 부분의 가죽을 만질 때의 느낌들, 그 거칠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이 참 좋았다. 그녀의 새끼손가락 아주 작은 뼈마디를 감싼 주름을 매만지던 감각이었다. 그러다가 서로 손가락 걸고 한 번 더 사랑을 약속하고, 손바닥에 맹세의 서명을 한다. 나의 큰 손으로 그녀의 작은 손을 감싸 쥐고 오므려 펴며, 그녀를 안았다.


지갑을 가슴 주머니에 넣으면 심장이 가까워 좋다고, 청바지 뒷주머니에 넣으면 ‘귀여운 엉덩이’라고 놀리고, 손에 쥐면 ‘오빠는 손이 참 따뜻해’라면서 서로 속삭이던 둘만의 대화들도 사라졌다.


스스로의 시간을 오롯이 겪어낸 어떤 것들에게만 살아있는, 그런 진짜들의 감정을 가진 지갑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준 그녀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없다. 더 이상 만질 수 없고, 앞으로는 떠올릴 수 없다. 내 깊은 마음은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는데, 또 잊어버리고 싶지 않았는데.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견뎌내기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파카 51 버건디. 파카사에서 제작한 명작 만년필 중 하나다. 지금은 생산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시중에 나와 있는 파카 51들은 적어도 20년 이상의 나이를 가진 펜이다. 구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만나기 쉽지 않은 만년필이다. 잃어버린 ‘파카 51’은 닿기 전의 기대와 떨림, 종이와 마주치고 나서 부드러운 희열까지 모두 만족감을 주었던 만년필이다.


이전의 사용감이 있었지만 그만큼 익숙한 번짐을 보여주었다. 뻑뻑하지 않으면서도 쉽게 흩날리지 않았다. 종이를 가리지 않고 잘 따라줬다. 무거웠지만 그마저도 아무 글자나 함부로 적지 말라는 책망이었다. 만년필이 온몸으로 말해주는 것 같았다. 지나온 이들에게 적당히 길들어 있으면서도, 앞으로 쓰게 될 주인의 손길로 채워줄 공간이 넉넉했던, 부디 내가 마지막이길 바라며 설레던, 앞으로 20년은 품겠다며 섣불리 다짐했던, 그런 만년필이었다.


그 만년필로 처음으로 적었던 글자는 ‘사랑하는 어머니’, 그 만년필로 가장 많이 쓴 글은 편지, 그중에서도 많이 적었을 단어, 그 사람의 이름, 이어서 보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참으로 아름답게 적히는 글자와 문장들, 과연 내 손으로 적어낸 것인가 의심스럽게 다정했던 모양들, 그 만년필이었기에 가능했던 곡선과 직선, 자신보다 잘 쓰면 어떡하냐며, 글자가 너무 예쁘다며 칭찬으로 편지 받는 기쁨을 애써 돌려 말했던 그 사람, 꼭 반만큼 물이 담긴 컵에 잉크 한 방울 떨어뜨리고 미세한 색의 결들이 흐트러지며 번져가는 모습, 오직 너의 색으로만 아주 천천히 물들고 싶다 다짐할 때 사용했던 그 만년필, 그 만년필 속 잉크는 큉크 블루블랙, 그 사람이 좋아하던 색, 쓸수록 가득해지던 그 만년필.


그 만년필로 필사했던 짤막한 문장이 수 만 줄, 글자에 힘을 담아내겠다면서 천천히 눌러쓰며 연습하던 그 만년필, 한 획씩 쓰는 모습에 무슨 팔만대장경 만드냐며 같이 놀림받아야 했던 그 만년필, 그런 내 고집과 억지를 받아주던 그 만년필, 글자를 적기 위해 만년필을 집어 들면 검지의 첫 번째 마디 왼쪽 부근의 느껴지는 작은 유격, ‘나는 너만이 알고 있는 특별한 만년필’이라며 믿음을 주던 그 만년필, 그 미세한 간격의 촉감이 전해지면 만년필과 손을 잡은 듯 흐뭇하던 그 만년필, 그 만년필을 나는 잃어버렸다.


줄리언 반스는 말했다. 고통은 기억에 풍미를 더해주고, 그 고통은 사랑의 증거라고. 신형철은 말했다. 한때 내가 가장 사랑한다고 믿은 대상이 이제는 내 삶의 무의미를 극명하게 증명한다고.


대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상실의 불안, 부재의 속수무책이 몰려온다. 텅 비어버린 나를 보며 무거움으로 채워졌던 그때의 내가 거북해졌다. 가진 게 많았고, 사랑이 깊었고, 욕심이 심했고, 노력마저 과했다. 이제 가벼운 나날들만 남았다. (18.06.26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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