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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kdaegeon Sep 22. 2019

그렇게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영감, 나 갔다 오께.” 다섯 할머니는 그렇게 제주도로 떠났다.

“영감, 나 갔다 오께.” 다섯 할머니는 그렇게 제주도로 떠났다. 


작년 가을, 동네 주민센터로 마실 자주 오던 할머니들이 모여 계를 만들었다. 한 달에 5만 원씩, 다섯 분이니 25만 원이었다. 그렇게 반년 모아봐야 150만 원 정도였다. 주위에서 사기라도 당하지 않겠냐 싶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어느 날, 노래교실을 운영하는 복자 이모가 조심스레 물었다.  


“할머니들, 돈 모아서 어디 쓰시게요?” 


“어? 우리 할망구들끼리 제주도 갈라고. 부럽지?” 


잘 모으나 싶더니 일이 생겼다. 옆 동네 민순 할머니가 넘어졌다. 다섯 할머니의 초대를 받아 동네 주민센터 노래교실에 오는 길이었다. 그날은 심수봉이 부른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배운 날이었다. 민순 할머니는 10살 때 흥남 부두에서 오빠와 생이별했다. 항구가 들어가는 노래면 다 좋아했다. 


다섯 할머니는 제주도를 위해 모아둔 돈으로 민순 할머니 병원비에 보탰다. 그러고 흐지부지되나 싶었는데, 할머니들은 다시 돈을 모았다. 그렇게 다섯 할머니는 제주도로 떠났다. 


일주일 동안 조용했던 주민센터 휴게실이 복작복작하다. 할머니들이 돌아오셨다. 


“할머님들, 잘 다녀오셨어요?” 


할머니들 너도나도 어디 어디 갔다며 난리다. 하긴 그럴 법도 한 게 모두 비행기 한 번 못 타봤다. 신혼여행도 제일 잘 떠난 사람이 경주였다. 게다가 자신들이 직접 가고 싶은 장소도 고르고. 신날만하고, 자랑할만했다. 


그런데 여행을 주도하셨던 봉덕 할머니가 기다렸다는 듯이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이 망할 영감탱이가 옥상 텃밭을 망쳐놨어.” 


이유는 이렇다. 봉덕 할머니에겐 20년 전부터 가꾸어 온 옥상 텃밭이 있었다. 매사 야무졌던 봉덕 할머니는 성격만큼 계산도 똑 바라지게 해서 회사에서도 경리로 시작해 총무과장까지 올랐다. 그러다 결혼도 하고, 애들 다 키워놓고 보니 마음이 허해졌다. 


어느 날, 옥상에 올라와 빨래 널고 하늘을 바라보니 엄마 생각에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20살 꽃다운 나이에 먹고살자고 도시에 올라와 갖은 고생 다 하며 버틴 삶이었다. 엄마가 쪄주던 감자며, 장에 갔다가 얻어다 주시던 딸기 같은 게 먹고 싶었다. 결국, 봉덕 할머니는 고장 난 수도꼭지 마냥 목 놓아 울고 말았다. 마침 집에 있던 사위가 무슨 일이냐며 올라왔을 정도였다. 


그래서 옥상에다가 텃밭을 꾸리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옥상 텃밭’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때라서 주변 걱정이 상당했다. 걱정이라기보다 핀잔에 가까웠다. ‘작물이 영양을 못 받을 것이다’ ‘거름 냄새가 지독할 것이다, 비라도 많이 오면 정말 다 쓸려간다’는 식이었다. 그때 주민센터 다섯 할머니는 봉덕 할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고 편 들어줬다. 그게 봉덕 할머니는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고 제주도에서 고백했다. 


그래도 할머니는 옥상텃밭을 밀고 나갔다. 할아버지도 농사꾼 집안 출신이었다. 그렇게 두 분은 옥상에 방수 작업을 하고 물길을 냈다. 음식물 찌꺼기를 모아 비료도 만들었다. 할머니가 하는 일에 실패는 없었다. 아늑한 옥상 텃밭이 만들어졌다. 멀리서 보면 정원 같은 느낌도 들었다. 거기에 등나무니, 대추나무, 포도나무니 나무도 심었고 한쪽에는 파, 가지, 양파까지 직접 재배하셨다. 벌레 꼬인다며 싫은 소리 하던 이웃들도 할머니가 매년 가져다주는 수확물에 반했다. 이제는 자기네도 텃밭을 하나 마련하고 싶다고 할머니에게 조언까지 구했다. 봉덕 할머니는 대통령 감이었다. 


“그 좋은 나무를 버리고 쇳대를 세웠어.” 


할머니가 제주도에서 돌아와 기분 좋게 옥상텃밭에 갔더니 포도나무 지지대가 전부 쇠기둥으로 변해 있었다. 할아버지의 소행이었다. 물론 할머니도 나무 기둥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마 거치면 썩어서 골칫거리였고 넘어지기도 했다. 매번 신경 써서 관리해야 했다. 


그럼에도 나무 지지대를 사용한 것은 옥상 텃밭을 처음 꾸려던 이유와도 같았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봉덕 할머니는 나무를 쓰다듬으면서, 어릴 때 만지고 놀던 엄마의 거친 살갗의 느낌을 떠올렸다.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적잖이 화낼 법도 했다. 


“이놈의 영감탱이,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얼마나 지났을까. 할아버지는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상을 마친 후, 봉덕 할머니는 이래저래 찾아준 사람들 주겠다며 포도를 따고 있었다. 포도는 실하게 익었다. 자연이란 참으로 신기해서, 사람의 손길이 없어도 자연이라는 이름값대로 자연스럽게 자라난다. 할머니의 텃밭도 그랬다. 


한참을 따다 보니 저녁 먹을 때가 다 되었다. 봉덕 할머니는 평상에 앉아 쉬시며 텃밭을 보니 기둥의 높이가 조금씩 내려가 있었다. 할머니는 그날따라 허리가 쑤시지 않았다. 


“이놈의 영감, 말이라도 하고 갔으면.” 


그리움으로 가득 찬 옥상텃밭이었다. 밭이 젖었다. 


(18.06.27, 소설가 서진의 에세이에서 아이디어 얻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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