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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kdaegeon Oct 03. 2019

언제나 깨달음은 늦다

순탄치 않으리라 예견한 삶이었다.

타자의 고통을 재생하는 언어, 설득이 아닌 공감의 언어, 원인과 결과가 없는 언어, 이것들은 현재와 미래가 섞였을 때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세계관을 장착하게 해 준다. 이 영화는 결정론적 운명관에 좌우되는 듯하면서도 그걸 당당하게 견디는 강한 긍정을 품고 있다.

— 김영진, 결정론적 운명관과 강한 긍정 사이 中


어느 날, 발톱을 깎으려고 바닥에 앉았다. 무릎을 세우니 웬 상처가 크게 나 있다.


“10살 때인가?”


10살 무렵, 체육관 뒷문으로 통하는 계단 난간에서 놀다가 시멘트 바닥에 떨어져 생긴 상처였다. ‘왜 떨어졌을까?’라는 궁금함보다 ‘내게도 10살이 있었구나’라는 의아함이 더 크다.


3일에 한 번꼴로 술이다. 오늘도 술을 마셨다. 다행히 평일이었고, 일원 중 한 명이 술을 못 하는 사람이었고, 마파두부밥이 생각보다 별로였고, 꿔바로우 주문하자마자 가지 튀김 시키지 않은 걸 후회했고, 눈이 와서 일찍 끝났다.


적당한 기억과 추억과 마음들이 요동치는 밤. 적당함은 아쉬움을 동반한다. 다시는 존재할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애틋함이 ‘적당’이라는 단어에 들어있다. 후회까지는 아니더라도, 적당한 거리감은 가지지 못할 것을 욕심내지 않기보다 가질 수도 있는 것을 끝내 밀어내고 마는 마음이다. 운명론이다.


얼마 전, 주체할 수 없는 대화를 하다가 “넌 도대체 어디가 잘못된 거 아니냐?”라는 말을 들었다. 요즈음 걱정과 고민과 답답함이 쌓여 마음이 꿍해 있기는 했지만, 몇 년 동안 그렇게도 거부해왔던 질문을 이렇게 갑자기 다시 만나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당황했고, 또 술을 마셨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맞는 말이었고, 나는 다시 거부해야 한다. 그런데 다시 강한 긍정의 마음을 키워보자고 시작한 글이 이 모양 이 꼴이다.


영화 보러 가고 싶다. 도대체 몇 편이나 예매했다 취소했는지 모르겠다. 마음먹어도 쉽지 않다. 하지만 이 글은 긍정의 글이니까, 긍정의 의지로 끝내야지. 이번 주에는 기필코, 날을 새서라도 기필코, 상영 내리기 전에 기필코 영화 보러 가겠다. (2017.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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