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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대건 Oct 07. 2019

정답은 아니다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

언젠가 전공 교수님 연구를 잠시 도와드릴 때 일이다. 폴 크루그먼을 논문 속 한 그래프를 한참 보던 교수님은 그것을 나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이 그래프의 곡선이 뭘 말하는 것 같으냐?” 당연히 나는 알 턱이 없었다. 물론 대충은 알지만, 설명할 길은 없다. 그런 날 보면 교수님은, 폴 크루그먼이 자기만 알게 그려놓았다며 자기도 답답하다고 하셨다. 세상에는 같은 것으로 보았지만 다른 것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


하이에크가 그 유명한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사촌동생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때의 기억과 함께 불안감이 들었다. 그리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이에크가 책 속의 ‘자유’ ‘사회주의’ ‘계획’ ‘정치’ 등 하이에크가 말한 단어의 뜻이 내가 읽은 단어와 진정 같은 것일까? 내가 아무리 읽어도, 하이에크만 알게 적어둔 것은 아닌가 싶은 것이다. 명쾌함이 똑똑한 사람들의 특징이라면 답답함은 그렇지 못한 이들의 몫이다.


그래서 하마터면 속을뻔했다. 하이에크의 학설도 수많은 대답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덤덤하게 읽어야 한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내 생각을 꺼내 비교해야 한다.


나는 하이에크와의 생각과는 달리 공동체를 믿는다. 집단과는 다르다. 집단이 경제적 혹은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모인 개인들의 모임이라면, 공동체는 개인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을 바탕으로 한 목적 없는 생활체이다. 목적이라면 그저 삶일까. 사람이 모이고 실질적 지방자치로 이어지면 사람의 삶에서 시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하이에크에 따르면, 그것 또한 전체주의의 망령이 되어버린다.


현실은 이렇다. 상위 1%의 사람들이 가진 자산이 전체 자산의 20%를 넘는 현실, 비효율적인 정부를 만드는 대기업의 과도한 영향력, 상위 1% 기업이 전체 기업 부동산 가치의 76%를 보유하고 있는 현실. 이미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고, 사회 속의 개인에게 과연 경제적 자유는 굴레의 다른 말이 아닌가 싶다. 경제적 자유가 오히려 경제적 자유 자체를 억압하고 있다. 하이에크가 지금 우리 사회를 진단한다면 누구를, 무엇을 탓할까?


에릭 프롬은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오로지 신을 위해 종사하며 살아야 했던 중세 암흑기를 오늘의 우리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오로지 돈을 위해 종사하며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를 수백 년 뒤의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나도 하이에크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15.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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