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리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석대건 Oct 06. 2019

아무런 의심도 없이 오직 희망으로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을 읽고 네로와 플란더스의 개를 떠올린다

차가운 대리석으로 쌓아 올린 성당의 계단은 날카롭게, 또 무겁게 솟았다. 그 위로 뒷짐을 지고 선, 높은 성당의 육중한 문은 인간이라면 열어내지 못할 것이다. 다만, 신은 모든 것을 던진 자에게만 한 가지를 허락한다. 그게 무엇일지라도. 네로는 문을 열기 위해 모든 것을 신에게 바친다. 자신의 작은 육체를 던져, 겨우 자신의 머리가 지날 만큼 틈새를 만든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네로의 저항이었다. 삶은 고통이고, 그 고통을 짊어져야 하는 것이 삶이라면 짧았던 네로의 삶은 충분하다 못해 과분했다.


아무런 의심도 없이 확실한 희망으로 네로는 걷는다. 쓰러진다. 다시 일어나 걷는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던 예수의 발걸음도 저렇게 고되었을까. 예수의 십자가가 인류의 죄였다면, 네로의 십자가는 무엇이란 말인가. 어째서 네로는 불행해야 했던가. 예수 탄생의 날, 네로에게서 죽음으로 걸어가는 예수를 본다.


네로는 고개를 들어 앞을 보려 한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힘이 없어 쓰러진다. 빰은 차가운 복도 대리석에 닿고, 내뱉는 신음은 입김으로 피어오르다가 이내 사그라든다. 성당 복도의 천장은 하늘만큼 높다. 네로의 눈길은 복도의 끝을 향한다. 저기만 지나면 그림을 볼 수 있다. 드디어 루벤스의 찬란한 성화를 보는 것이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그림을 가리던 암적색 장막이 걷히는 날, 부자에게도, 빈자에게도, 누구에게나 열리는 날, 만민의 기쁨으로 가득한 날, 그날 주의 찬미는 네로에게도 빛을 내릴 것이다.


겨우 일어나 걷는다. 한 걸음, 두 걸음. 복도의 벽은 겨울의 냉기를 내며 자신 이외의 거부한다. 네로는 다시 쓰러진다. 온도가 사라져 간다. 그런데 갑자기, 따뜻하다. 이상하다. 생명체의 온도, 파트라슈, 파트라슈가 네로에게 왔다. 네로는 다시 일어난다.


마침내 성화 앞에 닿았지만 네로는 절망한다. “주여, 나의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겨울의 밤은 길고 깊어 어둠은 모든 것을 삼켜버린다. 그것이 신의 조각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사람이 가진 무엇으로도 치울 수 없는 어둠, 그 저편의 모습을 감춘 성화는 끝내 네로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네로는 파트라슈를 애써 안으며 눈을 감는다. 어둠 속에서 마지막 온도를 지닌 네로의 눈물이 얼었다. 크리스마스였다.(15.12.18)

매거진의 이전글 식은 부대찌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