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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대건 Dec 08. 2019

가능성과 불확실성의 차이

드니 빌뇌브, 컨택트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을 때, 악은 빠져나와 세상에 퍼졌다. 시기와 질투, 분노와 욕심, 억압과 핍박 등 당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당신의 삶을 가두는 모든 고통이 상자에서 나왔다. 눈앞에서 흩어지는 악에 당황한 판도라는 급하게 뚜껑을 닫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때 상자에 오직 남은 것은 희망이었다. 인간이 고통 속에서도 살아가는 이유는 오직 희망이라는 이야기의 시작이다.


하지만 이것은 날조됐다. 우리는 희망이 왜 수많은 악(惡)과 같이 있었나부터 따져야 한다. 왜 희망은 날아가지 못했는가? 수많은 고통을 이겨낸 인류는 왜 희망만은 버리지 못했는가?


그건 희망은 곧 악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절망의 반대가 아니라 최상급이며, 희망은 용기의 근원이 아니라 반대말이다. 희망은 용기를 가진 인간을 억압한다. 가볍디가벼운 악은 날아가 버렸지만, 가장 무거운 희망만이 남았다.


그래서 감미로운 희망은 용기를 우선한다. 어쩔 수 없이 희망에 길들여진 인간이 희망한 다음 용기를 내는 이유다. 희망을 넘어서야만 용기로 비롯된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리고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용기 낼 수 있었다고 착각한다. 착각은 희망이 주는 고통이다. 인간은 희망으로 인해, 100% 가능성의 존재에서 50% 불확실성의 존재로 후퇴했다. 희망이 그렇게 만들었다.


영화 <컨택트>에서 루이스가 처음 애봇과 코스텔로에게 다가갔을 때, 나는 망설였다. 아니 희망했다. 나도 희망에 길들여진 인간이다. ‘누군가 막지 않을까’ 그래야만 희망은 유지되고 무너지지 않는다. 그래야만 저들이 우리를 죽이지 않으리라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하지만 루이스는 나아갔다. 그것은 100의 가능성을 가진 용기였다. 이는 전쟁의 의미는 ‘분쟁’이 아니라 ‘더 많은 소를 원한다’는 것, 그리고 네가 말한 전쟁이 더 많은 소를 원한다는 뜻이라면, 우리는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의 용기다. 희망이 거세된 용기였다.


어쩌면 헵타포드어에는 희망이란 단어가 없을지도 모른다. 시간의 존재가 없음은 이미 안다는 뜻이며, 희망할 이유가 없다. 결정론과는 다르다. 왜냐면 이미 정해진 미래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용기가 있어야만 한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그 삶을 감당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용기다. 루이스는 한나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극복해냈다.


삶을 결정하는 인간, 그리고 그 인간의 용기는 드니 빌뇌브의 영상에서도 드러난다. 이 시대의 영화 속 지구적 스케일은 ‘겨우’의 다른 말이다. 영화는 인간의 상상력을 키우고, 또 가두었다. 멀리, 높게, 작게 보게 했으나 바로 앞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드니 빌뇌브가 그리는 지구는 아름답고 웅장하다. 새벽의 안개, 도시의 불빛, 바다 위, 해안가 위에 부유하는 반원 우주선과 어우러진 지구는 생경하고 또 경이롭다. 그 지구에 인간이 있다.


마지막으로 음악, 컨택트의 사운드는 아이슬란드 뮤지션 요한 요한슨의 작품이다. 시간을 재배열하는 음악이 아닌, 시간을 지워낸 음악, 시작과 끝이 무의미하여 플레잉타임을 볼 필요가 없는 음악을 들려줬다. 운명의 장난일까. 요한의 아들 요한 요한슨의 이름은 루이스의 딸 Hannah처럼 반복된다. (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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