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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kdaegeon Dec 26. 2019

하늘에서 터지지 않는 불꽃놀이

불꽃놀이의 특징은 무차별성이다. 하늘에서 수없이 터지는 불꽃, 모두에게 열려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이 시대의 자본주의는 그것마저도 통제하기 시작했다. 아니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명당이라는 이름으로, 유료석 구획이 정해졌다. 타인에게 방해받지 않기 위해 블라인드가 만들어지고 프리미엄이 붙었다. 불꽃이 잘 보이는 고층 호텔은 하룻밤 머무는 가격은 웃돈을 주고도 얻지 못할 만큼 올랐다. 카페나 술집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자릿세만 식비의 10배, 20배가 됐다. 그나마 돈을 내지 않고 앉을자리는 찾기 힘들었고, 누군가는 돈을 받고 대신 자리를 맡아주기도 했다.


2016년에 존재하는 ‘차별’도 불꽃놀이와 다르지 않다. 거의 모두 자본주의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작은 표상인 일베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들은 성적 소수자, 특정 지역민, 이주노동자, 장애인 등 사회적 차별을 받는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더 적대적이다. 일베가 공격한 집단 중 여성들이 더 크게 반발했기 때문에 여성 혐오만 돋보이는 것이다. 일베는 그들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부당한 특권을 누린다고 판단, 그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정희진) 거기에는 ‘같은 사람’만 인정하겠다는 인종주의와 다른 비(非) 사람은 불(不) 인정하겠다는 배타주의가 들어있다.


일베가 대표적으로 적대성을 드러냈을 뿐, 이 사회에 속한 거의 모든 구성원은 누군가를 차별하기 위한 편견의 전제를 가지고 있다. 자신이 자신과 다르게 보고, 판단하는 이상 그것은 이미 편견의 영역이다. 그 후에는 일베와 같이 단지 이해(利害) 관계만 남을 뿐이다.


차별을 가진 사회는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관용을 만들어낸다. 미국의 정치학자 웬디 브라운의 지적대로 자본주의에서의 자유주의 정치적 차원의 관용은 시장주의 관용을 용납하지 않는 이들을 관용의 대상에서 배제해버린다. 그 과정에서 사회의 일원이었던 그들, 사회 속에서 차별의 편견을 만든다는 성적 소수자, 이주노동자, 장애인, 비정규직, 특수노동자들이 가진 권리는 시혜로 변질된다. 동시에 관리의 대상으로 인정되면서 사회에 포섭된다. 그렇게 차별은 지속된다.


결국 이런 특정한 차이를 문제로 만드는 권력관계에서 보자면, 차이는 질서 밖으로 내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베푸는 관용을 통해 기존 질서를 보존하는 범위에서 관리된다는 브라운의 말대로 현실화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그들이 정치적 주체성을 잃어버린다는 거다. 점점 정치적 실천 또한 요원해지고 차별은 고착된다.


뇌공학자 정재승은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은 감성이 아니라 이성의 영역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아이고, 불쌍해라’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힘들구나’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더불어 만약 차별하고 싶지 않다면 실천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차별은 ‘자연화’ 되어있다. 스테파니 쿤츠의 조언대로 우리가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은, 어떻게 정의를 내리든, 공동체나 다른 이를 돕기 위한 정치적 행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차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일 또한 그들과 함께 하는 정치적 행동의 실천이다.(16.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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