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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kdaegeon Feb 25. 2020

저는 이 영화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덕혜옹주를 보고

『 덕혜옹주 』는 공주에 대한 역사적 트라우마를 드러낸 영화다. 다행스럽게도 거의 모두가 까고 있다. 나도 ‘굳이’ 깔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이 들어 다행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들이 있다.


지옥의 다른 말


구한말 조선은 지옥이었다. 고종은 그저 나약한 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국제적으로 격동의 시기이기는 했다. 제국주의로 뻗는 일본, 부동항을 꿈꾸는 러시아, 중화를 버리지 못한 청까지. 상황으로 보자면 누구에게 먹히느냐의 문제만 남은 상황이었지만, 그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백성 목숨 결정권을 가진 왕의 변명이 되지 못한다.


도대체 난세에 가장 중요한 위치에 앉아서 ‘도와달라’ 밀서나 보내는 왕이라니. 그런 왕을 아비라고 따르던 백성들. 다시 말하지만 고종 집권기에는 그야말로 분노와 절망의 시대였다. 덕혜옹주는 그 시기로부터 피어난 이야기다. 비운의 공주마냥 말해도 잘 먹고 잘살았던 옹주를 아무리 좋게 봐줄 수 없다. 예로부터 내려온 공주에 대한 역사적 트라우마다.


그들도 가족인가


덕혜옹주는 왕의 ‘어여쁨’을 받는 공주였다. 아마 ‘어여쁨’은 고종이 마음대로 의지 소관이었을 것이다. 역사를 떠나서 영화에 대한 불만은 이 부분에서 비롯된다. 덕혜는 왜 그렇게 고종과 그 어미를 그리워할까? 아비라서? 어미라서? 스토리를 내내 끌어가는 것은 조선이라는 고향과 가족이라는 그리움임에도 <덕혜옹주>에서 덕혜가 그토록 애달파하는 가족의 실체를 찾을 수 없다.


그나마 영화에서 가족애를 느낄 수 있는 지점은 발을 씻겨주는 장면과 고종이 몇 번 안아주는 장면이다. 그 외에는 없었다. 덕혜가 가족과 정서적 교감을 나누는 장면은 더더욱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장한, 그 첫사랑의 애틋함이라면 모를까. 덕혜옹주가 조선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사무칠 때마다 내뱉는 감정은 관객에게 ‘네가 여기서 가족의 정을 떠올리지 못한다면 넌 정상적인 가족에서 자란 게 아니’라고 몰아세우는 폭력과도 같다. 감동은 실패했다.


그리고 캐스팅


결국 <덕혜옹주> 손예진이다. 손예진의 작품 중에 드라마 <연애시대>를 참 좋아한다. 과거, 현재를 추억처럼 넘나드는 연출이 좋고, 이혼이라는 소재를 가볍지도 않게, 무겁지도 않게 그려내서 좋았다. 그 안에 애틋한 사랑이 있어서 좋았다. 당연히 연기도 좋고, 각본도 모두 좋았다. 내레이션과 어울리는 장면들은 담백함에 서울 필터를 넣은 따뜻함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손예진이 있다.


손예진이, 아니 덕혜가 넘어질 때마다, 또 울먹일 때마다 <연애시대>의 은호가 떠올랐다. 특히 조선 광복 소식을 듣고 돌아가려고 찾아온 출입국 관리소(?)에서 결국 문을 넘어가지 못하고 쓰러지는 장면에선 인생의 답답함을 못 이겨 피클병(링크)을 내던지던 연애시대의 은호 그 자체였다. 극심한 우울증에 약간 정신이 나간 상태까지도. 덕혜옹주에 덕혜는 없고 손예진만 있다.


고수의 잘생김은 화면 가득 찼고, 한택수를 분한 윤제문도 적당히 코믹스럽게, 딱 영화가 감당해낼 만큼 악(惡)을 연기해줬다. 젊은 장한에게서는 희재의 박해일이, 나이가 든 후에서는 은교의 이적요가 보이긴 했지만 좋은 연기였다. 영친왕을 분한 박수영도 대단했다. 매사에 망설이고 애매모호한 태도,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미간이 찌푸려지는 시선과 대사. 연기라고 봐도 짜증이 나는데 왕이라고 하는 사람이 앞에서 저러면 얼마나 답답할까. 라미란도 좋았다. 짧은 시간 안에 감정을 올려야 하니 다소 과한 느낌이 없진 않았지만 충분한 역할을 해줬다.


처음부터 덕혜옹주는 영화로 살리기에는 너무 재미없는 캐릭터였다. 그 증거가 이렇게 빵빵한 조연 캐스팅이다. 손예진이 화면에서 보이지 않더라도 눈이 쉴 틈이 없도록 말이다. 아는 사람만 나오면 지루하지는 않을 테니. 결국 캐릭터는 사라지고 배우만 남았다.


손익분기점을 넘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타깝지만 이런 영화는 좀 망해야 한다. 오로지 마음에 들었던 하나는 장한의 대사 “저는 이번 정부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였다. 티비에서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차라리 8월의 크리스마스를 틀어달라. (1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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