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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kdaegeon Feb 25. 2020

어떤 의구심

존 롤스의 『 만민법 』 은 인류의 토정비결 같은 책이다.

어떤 이는 말한다. 나쁜 세상에서 예쁜 말은 위선이라고, 지옥에서 생을 긍정하는 말은 희망이 아니라 절망이라고. 그런 이유로 나는, 존 롤스의 만민법에 대한 어떤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현시대에 ‘합당하게 정의로운 질서 정연한 만민의 사회’가 가당키나 한가. ‘현실주의적 유토피아’는 그저 꿈에 불과한 것이 아니냔 말이다. 가난과 불평등은 심화되고, 테러는 끊이지 않으며, 폭력과 파괴는 난무하고, 죽음은 일상화되어 있다. 합의는 지켜지지 않는다. 만민법은 꿈이 맞다.


“합당하게 정의로운 질서 정연한 만민의 사회는 자유주의적 사회나 적정 수준의 국내적 사회와 동일한 방식으로 현실주의적이다.”


아니 욕망에 가깝다. 만민의 사회는 만민의 이름으로 하나의 국가를 구축해내려는, 바벨탑과 같은 것이다. 이에 대해선 롤스의 예언대로 권력 중심의 숙명론적 냉소주의라는 점을 인정할지라도, 만민법이 받아들일 수 없는 꿈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현재 지구에서 그나마 ‘합당하고 정의롭다’고 평가되는 EU에서 벌어지는 난민 사태를 보라.


난민의 피해적 관점에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터키는 EU 가입을 대가로 난민을 두고 거래했고, 프랑스에서는 난민 이슈로 르펜의 극우정당이 세력을 넓혀가고 있으며, 독일에서는 난민이 집단성폭행 사건을 일으켰다. 북유럽에서는 난민 추방에 관한 법률 제정과 그에 따른 논쟁이 벌어지고 있고, 각국에서는 난민의 추가적 유입에 난감해하고 있다. 가장 ‘국내적 사회와 동일한 방식의 국제체제’인 EU 안에서도 이지경이다. 존 롤스가 말하는 합당한 공적 이성과 정치적 정의관으로 실현된 현실주의적 유토피아를, 나는 도대체 짐작도 할 수 없다.


“유토피아의 결점은 당장에 결실을 볼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는 데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실현 불가능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실현 가능성은 국가를 부정해야만 성립될 수 있을까. 우리가 겪고 있는 대부분의 난제가 국가라는 존재로부터 비롯된 것이긴 하다. 중세, 베스트팔렌 이전 ‘국가’라는 어떤 것이 없을 적에는, 즉 지역체제에서 유토피아는 가능했을지 모른다. 물론 국가의 부정이라는 것이 국가의 해체를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EU가 가장 진일보한 국제체제라 할 수 있는 이유도 국가를 부정하지 않고도 아주 조금씩 시간을 들여서 합의를 통해 국가가 가진 자결권을 EU라는 가상의 주체로 만들어냈음에 있다. 지정학적인 측면에서도,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만민의 사회’에 가장 비슷했다. 여기서 자결권은 국가 존재의 이유가 됨은 당연하다. 롤스 또한 원조의 의무로써 이유는 뒷받침한다. 그런데 이런 EU 체제에 사망선고를 내려야 한다면 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얼마나 준비하고 기다려야 하는가.


“만민법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질서 정연한 만민의 사회의 성원으로 살아가는 자유적 사회와 적정 수준의 사회들의 올바른 이유들에 입각한 정의와 안정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롤스의 예언은 차차 실현되고 있다. 자본주의의 칼을 든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지나가고 있는 와중에 미국에서는 사회주의자 샌더스가 등장했다. 샌더스가 대통령이 될지는 미지수이나 점점 미국은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사회 속 최소 수혜자들의 삶에 맞춰갈 것이다. 이것은 존 롤스의 국내적 차등 원칙이기도 하다. 미국이 달라진다면 몇 세기 안에는 전지국적인 ‘사회계약’이 가능할지 모른다. 만민법의 시대 말이다. 더불어 EU 또한 자신들만의 방법대로 ‘공적 이성’을 찾아갈 것이다. 이성의 역사는 곧 유럽의 역사이기도 하다.


미셸 푸코의 말대로 오늘의 철학은 전적으로 정치적이며 전적으로 역사적이다. 우리나라를 보자. 철학? 그런 달달한 것이 남아 있기는 한가? 확실한 것은 누군가의 정치와 누군가의 역사에 의해 우리들의 철학은 이미 먹힌 지 오래다.(16.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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