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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kdaegeon Feb 25. 2020

아메리카노와 폐지값에 대한 소고

장 자크 루소의 『 인간 불평등 기원론 』

장 자크 루소의 『 인간 불평등 기원론 』 은 인간 고통 기원론으로 적어야 옳다.


나는 3,000원을 들고 아메리카노를 사서 마시지만 횡단보도를 지나가는 저 할머니는 자신보다 더 많은 폐지를 리어카에 쌓아 카페 반대편 고물상에서 1,500원을 받는다. 아니, 그것보다 더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일 3,000원보다 더 비싼 아메리카노를 마실 것이다. 불평등의 기원, 얼마나 구태의 주제인가. 루소의 말처럼 자연법의 세계에서 우리는 평등했다고 인정할지라도, 지금은 자연법의 세계가 아니라서 평등하지 못할지라도 내일의 커피와 폐지 값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 책은 속임수다. 불평등이라는 대전제와 그에 따른 조건을 비교하게끔 만들어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불평등은 고통의 다른 말, 고통의 반대말이 환희라는 점에서 불평등의 짝인 평등은 환희가 되어야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결국 이 책의 제목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 아닌 ‘인간 고통 기원론’으로 적어야 옳다. 체제가 주는 고통을 불평등과 평등이라는 이분법으로 만들어 본질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평등하더라도 사회는 충분히 고통스럽다. 결국 루소는 고통을 만들어낸 이 체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논해야 했다. 자본주의 말이다. 물론 그 당시에 충분히 적극적이었겠지만, 여전히 아쉽다.


쿠츠네츠 가설이란 자본주의 국가가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불평등이 증가하다가 어느 시점을 지나면 감소한다는 내용이다. 시간의 경과에 따른 불평등도의 변화에 관한 이론이다. 그러나 쿠즈네츠 가설은 증거가 약하다. 우선 기본적으로 거론되는 소득 불평등은 경제적 불평등의 한 종류인 뿐이며 소득에 있어서도 부동산이나 주식 등의 구분해야 할 소유자산은 엄청나게 많다. 비경제적 불평등 또한 무시되고 있다. 인종, 종교, 성별, 성적 기호, 이데올로기 등 수많은 불평등이 있다. 평등의 개념 정의를 따지지 않더라도 우리나라를 보면 확실하게 쿠츠네츠 가설은 틀렸다. 보라. 경제적으로 발전하지 않는데도 불평등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장하준 참조)


요즘 우리는 평등과 불평등을 헷갈리고 있다. 앤디 워홀은 말했다. 자본주의의 평등은 부자든 가난뱅이든 (내가 되었든 폐지 할머니가 되었든) 코카콜라는 1달러에 사 먹어야 하는 평등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말은 절반만 맞다. 자본으로 무엇을 교환하면서 그것이 상품 가치를 획득하게 되었을 때, 평등해지는 것이 자본주의의 평등이다. 그러나 교환되지 못하는 것, 상품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은 평등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나의 1,000원과 폐지 할머니의 1,000원은 자본주의의 평등에 속하나, 독재에 대한 혐오와 여성에 대한 혐오는 평등하지 않다. 아예 그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다.(이택광 참조)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미 형식적 불평등에 물들어 있다.(15.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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