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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kdaegeon Feb 25. 2020

법이 나의 편이리라는 오해

김영란의 『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 』

김영란의 『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 』 는 법이 팩트에서 비롯된다는 오해에 관한 책이다.


친구가 살던 자취방에서 생긴 일이다. 추위를 많이 타던 친구였지만 추운 것보다 더 싫은 것은 바로 곰팡이였다. 이 방에 선택한 것도 곰팡이가 없다는 것이 큰 이유였다. 그런 어느 겨울날, 전기장판에 의지하면 살아가다가 너무 추워서 하는 수 없이 보일러를 하룻밤 돌렸다. 그런데 퇴근하고 돌아와 보니 신발장 뒤쪽에 곰팡이가 슬어 있는 것이 아닌가.


자신이 그렇게까지 관리를 했음에도 곰팡이가 생긴 이유를 따져보기 시작했다. 하룻밤만에 만들어졌을 리는 없었고 벽지 뒤에 숨어있다가 난방으로 갑자기 습기가 차서 등장한 것이라 판단했다.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던 친구는 집주인에게 벽지를 새로 도배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주인 曰


“그것이 어째서 내 책임인가 나는 세를 내어줬으니, 관리책임은 너에게 있다. 나는 시설유지의 책임이 있다. 곰팡이가 생긴 것은 관리의 문제이니 나의 책임은 없다. 오히려 반대로 집주인인 내가 세입자에게 곰팡이를 생기게 한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덧붙여 “법대로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라고 일갈하고, 친구의 답은 듣지도 않은 채 뒤돌아갔다.


나의 친구가 집주인의 엄포에 항의해 고소하고 1심 판결로 누군가는 또 항소를 하고, 대법원에까지 올라갔다면, 아마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의 10대 논쟁에 포함되지 않았을까 싶다. ‘세입자와 집주인의 곰팡이 책임’ 정도의 제목이라면 괜찮을까.


많은 사람들이 팩트, 팩트 말하고 들지만, 정작 중요한 쟁점에서 팩트는 그다지 고려대상이 아니다. 대법원 판결 또한 사실관계의 인정 여부는 1심, 2심에서 마무리하고, 판결을 뒤집을 만한 중요한 사실이 발견되지 않는 이상 대법원의 전원합의체는 법적 해석만을 다룬다. 대법 단계에서 새로운 사실이 드러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곰팡이 사건에서도 사실은 변하지 않고 해석만 남게 된다. 법관은 ‘곰팡이’가 무엇인지에 대한 실질적 정의와 형식적 정의를 따지고, 곰팡이 없이 살 권리, 난방할 권리, 월세와 전세의 차이, 관리자의 의무 범위 등등 결부된 가치들을 고려하고, 나아가 정당한 인과관계 설정으로 책임의 경중을 가려내며 관련 법과 판례들을 모아 판결의 근거를 만들 것이다.


그 과정에서 헌법을 비롯한 여러 법들이 동원된다. 하지만 그것은 근거를 위한 도구로서 가져오는 것이니 ‘법대로 하자’는 말은 허언에 불과하다. 법관이 품고 있는 가치가 최우선이다.


우리는 법에 대해 너무나 많은 오해를 하며 살아간다. ‘법은 나의 편’ 일 것이라는 오해 말이다. 전혀 그렇지 않지만,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쉽게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기에, 그런 착각이라도 허용해야 될 테지. 과연 법관들은 집주인의 손을 들어줄까? 내 친구의 손을 들어줄까?


가치의 우선순위 혹은 찬성과 반대에 대한 쟁점으로 꾸려진『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 』 (이하 ‘판결’)는 ‘생각보다’ 쉽지 않은 책이었다. 사안 자체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공부하고 조사하면 되는 것들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에 발생한다. ‘내가 가진 의견을 저 사람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또 ‘나는 내가 주장하는 가치 반대에 있는 목소리를 어떻게 수렴할 것인가’ 같은 것들이다. 토론을 어떻게 해야 유의미하게 남을 수 있단 말인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막막했다. 불가능에 가까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의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물음을 던지지 않고선 답을 구할 수 없고, 답을 구하지 않고선 어떤 변화도 얻을 수 없다. 정답이란 것이 따로 있고, 정답을 알아야만 문제를 없앨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썩 훌륭한 답이 아니라 해도 나름의 답이 있어야만 우리의 몸과 마음을 움직여내는 확신과 의지가 생겨난다. 정답보다는 해답을 찾는 노력을 하자.(16.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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