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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kdaegeon Jan 21. 2020

또라이들의 어떤 대화

다미엔 차젤레, 『 위플래쉬 』

다미엔 차젤레의 『 위플래쉬 』 는 프리즘을 가진 음악영화다.


몰입이니, 10만 시간 법칙이니 ‘유달리’ 교육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우리나라. 그새 교육하지 못해 안달이 났는지 또 하나의 교육법을 탄생시켰다. 이름 하야 위플래쉬 교육법, 말 그대로 채찍질 교육이다. 얼핏 보면 스파르타 교육법 같기도 하다. 스파르타는 지속적인 주입을 통한 신체적인 고통과 성취와 그에 다른 결과, 또는 승리 혹은 패배에 대한 정신적인 압박을 준다. 겉으로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대상을 다루는 방식이 다르다. 스파르타에서는 성공하면 칭찬을 받고 실패하면 비난받는다. 그러나 위플래쉬 교육법에서는 무조건 비난이다. 힐링 시대의 레토릭에 반발인가 싶을 정도다. 여하튼 채찍질 교육은 아무리 잘하더라도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에는 한없이 부족할 뿐이고, 끊임없는 자극을 준다. 실패하는 자는 애초부터 성공하지 못할 자였다. 그러다 보니 모욕적인 욕질이나 폭력도 불사한다. 몰아붙인다. 오직 이상, 위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 말이다. 이것이 채찍질, 위플래쉬 교육법이다. 그런데 이게 교육인가.


우리는 왜 그토록 거침없이 타인의 인생을 가늠하는가. 늘 남들에게 관심이 많고, 서슴없이 판단하고 평가한다. 타인에게 자기 생각이나 신념을 강요한다. 그러면서 말한다. “이게 다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다.” 우리는 채찍질을 통해 그 위대하다는 꿈의 욕구를 스스로 스승에 되어, 네이먼이 되어 미래의 학생들에게, 타인에게 강요하고 싶은 것이다. 다 그들을 위해서라는 핑계로 말이다. 다시 묻자. 이것은 교육인가. 하나 더 묻자. 그 위대한 꿈은 누구의 꿈인가.


당신은 영광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희생할 수 있는가. 사랑도, 가족도,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피를 흘리면서 드럼이 올려진 무대로 뛰어갈 수 있는가. 피범벅이 된 손으로 스틱을 들고 드럼을 잡을 수 있는가. 당신은 꿈이라는 마약에 빠져 그렇게 행동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그것은 광기다. 결국 학생이자 제자였던 이는 퇴학을 당했고, 선생이자 스승이었던 이는 학교를 떠나야 했다. 교육은 실패했다. 아니, 그것은 교육이라고 할 수 없는, 그 어떤 대화는 끝나다. 단지 학교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교육처럼 보이는 것뿐이다. 같은 집에 살면 가족처럼 보이듯. 위플래쉬’는 절대로 교육영화가 아니다. 그러므로 위플래쉬를 교육으로 말하지 말자.


그래, 음악으로 보자.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우리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일은 몸을 움직이는 일이라고. 그 몸을 움직이는 일 중에서 가장 창조적인 것 하나가 음악, 음악을 만드는 일이리라. 확신이 가득 찬 음악, 상상만으로도 벅차오른다. 그 확신은 무엇으로부터 생겨날까. 그것은 ‘음악적 신뢰’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연주자와 연주하는 악기 사이에,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단원 간에, 듀엣과 트리오, 콰르텟의 멤버들끼리 서로 정성껏 최선을 다해 맞추기로 하는 암묵적인 약속, 이 음악적 신뢰가 ‘음악’을 만들어내는 확신일 것이다.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단순한 대화는 무의미하다. 그것만으로는 상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어떤 경우에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행동으로만 진정한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방법으로 진정한 의도를 확인할 때 신뢰 구축은 가능하다. 앤드류와 네이먼은 이 같은 과정을 음악으로 만들어낸다. 마치 나무가 온 몸과 마음으로 나무인 것처럼, 돌이 온 몸과 마음으로 오직 돌인 것처럼, 둘은 온 몸과 마음이 오직 하나의 의도, 바로 음악만을 위해 존재하게 된다. (15.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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