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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kdaegeon Dec 17. 2019

내가 여성이었다면

그때 나는 죽었다

언젠가 술을 한 3병 정도 마시고 새벽 4시가 되었을 때, 지금 많이 취했으니 집에서 자고 가라고 지인의 말에 “괜찮다”고 고집을 부렸다. 조금만 지나면 첫차 시간이었다. 분명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괜찮지 않았다. 눈을 떠보니 나는 지인과 헤어졌던 곳 근처 화단에 널브러져 있었다. 만약 내가 여성이었다면.


대학 시절, 잠시 살았던 이모 집은 서울과 부천의 경계였다. 지하철을 타고 온수역까지 간 후, 또 마을버스를 타고 들어간다. 그리고 종점 바로 전 정거장에서 내려 20분 정도 걸어야 했다. 그곳은 도시와 도시 사이, 스산한 곳이었다. 집으로 가기까지 가로등은 30m마다 있었다. 빛과 빛 사이의 어둠은 생각보다 길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다녔다. 만약 내가 여성이었다면.


약속 시각에 늦어 택시를 탔을 때였다. 마음이 바빠 택시기사에게 “조금만 빨리 부탁드려요”라며 “XX사거리로 통해서 가달라”고 말했다. 그 기사는 “길 막히는 건 어쩔 수 없어”라고 반말로 대꾸했다. 그러려니 하고 잠자코 봤더니 길을 돌아가더라. 다행히 내가 아는 길이라 망정이었다. 속을 뻔 했다. 화가 나서 “지금 아까 말해준 길로 왜 안 가는 거냐”고 따졌다. 그랬더니 기사는 “아 그랬지”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여기서 내려달라”고 말했다. 기사는 중얼거렸다. 화가 났을 것이다. 만약 내가 여성이었다면.


친구의 자취방은 학교 후문 오피스텔이었다. 그날도 축구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여느 날처럼 친구와 나는 축구를 봤다. 한참 불평을 쏟아내다 보니 치킨과 술이 떨어졌고, 우리도 곯아 떨어졌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쾅! 쾅!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분명 문을 치는 소리였다. 하지만 좀 멀리서 들렸다. 새벽 3시였다. “어떤 미친 새끼가!”라고 하며 문을 열고 나왔다.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바로 위층에서 나는 소리였다. 울림이 복도에 퍼졌다. 올라갔더니 검은 형상이 문틈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열어줘”라고 말했다. 그리고 또 문을 두 번 쳤다. 나는 “뭐 하는 거요”하고 물었다. 검은 형상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남자였다. 그는 내 앞을 지나 계단으로 내려갔다. 난 다시 친구 자취방 층으로 내려와 창문을 열고 담배를 한 대 더 물었다. 내려다 보니 아까 그 남자가 가로등 아래서 전화를 들고 있었다. 나는 ‘또 올라오겠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신고했다. 5분 정도 지나자 경찰이 왔다. 남자는 잡혀갔다. 경찰차를 타면서 날 한 번 본 것 같다. 나는 다시 친구 방으로 들어와 잤다. 만약 내가 여성이었다면. (18.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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